일본서기, 삼국사기, 무령왕릉지석명문 등이 문헌 자료에 의해 무령왕과 그 전후시대의 대화왜경영사관을 종합적으로 살펴봄과 동시에 백제왕의 대화왜경영사관을 일본에서 어떻게 은폐했는가도 아울러 보고자 한다.
백제왕의 즉위년 차이와 계보관계에 있어서도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는 차이가 난다. 일본서기는 삼근왕, 성왕, 위덕왕의 계보관계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이라 하기도 하고 개로왕의 아들이라고도 하는 등 매우 조잡하여 믿기 힘들다.
백제왕자를 대화왜에 파견한 것은 백제의 22행정구역에 백제의 왕자나 왕족을 파견하여 통치하게 했다는 중국 기록과 일치하며 대화왜는 백제 22 담로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개로왕 458년 백제의 왕녀나 왕족이 아닌 귀족의 딸을 보내 왜왕 웅략과 짝을 지어준 것은 백제와 대화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백제는 전문적인 국가경영인을 대화왜에 파견하고 이들의 파견근무는 일정기간 대화왜를 경영하다 백제본국으로 귀국하는 임기제와 수시로 파견되어 근무하다 귀국하는 부정기제 두가지 제도가 있었다. 파견시 백제인들은 백제 관직을 갖고 있었고 대화왜 경영에 주력한 분야는 유교적인 행정관리, 불교보급, 역학, 일력계산, 채약, 한방치료, 음악 등이었다. 관위가 제일 높은 관인이 그 팀의 수장이 되어 대화왜를 경영하였고 덕솔의 백제관사가 대화왜 경영팀의 실무 책임자였다. 무령왕의 대화왜 경영사실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관, 대도 등 수많은 종류의 황금 유물이 이 사실을 물질적으로 뒷받침 해준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대화왜경영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내에서도 은폐되어 있고 일본고대사학자들에 의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은폐공작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적어도 기록상 개로왕, 무령왕, 성왕, 위덕왕, 의자왕 시대의 백제는 대화왜를 경영한 사실이나 막대한 양의 필요 물자를 대화왜에서 백제로 가져왔음을 알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