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의자왕대 태자책봉문제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검토한 것이다. 의자왕대 복잡한 태자기록 검토결과 우선 무왕의 왕자인 부여풍은 의자왕의 태자가 아니었다. 또 의자왕의 왕자로 생각되는 부여강신을 제외하면 효와 융의 경우 모두 의자왕의 태자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때 의자왕의 태자는 2명으로 그 가운데에서 효는 의자왕의 첫 번째 태자로 효와 모계를 달리하는 융은 두 번째 태자로 책봉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의자왕애 2명의 태자가 나타난 것은 당시 정치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의자왕은 즉위 후, 무왕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태자제도를 보다 확립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의자왕의 전제왕권 강화책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태자 효의 조기 책봉과 태자궁의 중수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의자왕의 이러한 정책은 상당한 반발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자 효와 모계를 달리하는 왕서자들의 반발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부여융의 모후인 군대부인 은고가 가장 대표적 세력이다.
이에 군대부인 은고는 의자왕 15년을 전후한 시기에 권력을 장악하면서 의자왕이 추구한 초기의 여러 정책을 상당히 변화시켰다. 은고는 왕서자에 대해 좌평으로 책봉하고 식읍을 또한 제공하는 등 그들의 정치적 위치를 크게 보장해 준 것이다. 이후 태자교체를 단행하여 그것을 보다 확실히 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효를 대신하여 은고의 아들인 부여융에 대한 태자책봉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군대부인의 정치 역시 순조로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의자왕 말기에 나타난 빈번한 이변의 발생과 곧 이어 진행된 백제의 멸망이 그것을 잘 말하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