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齊書』「百濟傳」과 『三國史記』「東城王紀」에 기록된 위로의 백제 침입 및 격퇴 기사는 백제의 내부적 발전과 짝하여 해석되기 보단 대중관계의 일부분으로서 처리되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는 사실 자체의 구체성이나 신빙성에 기인한 바 크다. 위로와의 전쟁에 대한 발단이 이루어진 『南齊書』의 내용은 그 시대의 외교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았다. 하지만 『南齊書』「百濟傳」의 내용 가운데 위로의 백제침입 기사만은 『南齊書』 찬자의 인식에 의한 서술이었다. 『南齊書』에 의하면 북위를 위로로 비하하여 「魏虜傳」을 두고 위로를 흉노가 만든 오랑캐국으로 기록한다. 『南齊書』「百濟傳」에서의 위로 침입기사는 경오년 전쟁기록에 근거하고 이다. 이 경오년 기사는 백제에서 남제에 올린 상표문 중의 일부이다. 서두에 그의 상대를 혐윤으로 그리고 실전 상대는 흉리를 동일시하여 같은 해인 490년 상표문 및 조서 뒤에 위로 침입 기사로 기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백제에서 남제에 보낸 상표문 중 경오년 전쟁의 상대는 흉리였다. 이곳의 흉리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三國史記』 찬자는 『南齊書』.『南史』의 중국정사 기록을 모대, 모도 관계에 대한 의시에서 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三國史記』「東城王紀」에 기록된 위병침입 기사와 『南齊書』「百濟傳」 내용에는 2년의 기년상의 차이가 있다. 이는 『南齊書』「百濟傳」 내용을 취할 때의 삼국사기 오류가 아니면 다른 사료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만약 삼국사기 찬자가 『南齊書』.『南史』의 내용을 취하지 않았다면 삼국사기에서 자주 인용된 『冊府元龜』.『資治痛鑑』에 주목해야 했다. 그러나 『冊府元龜』에서도 그의 모든 내용들이 모대, 모도관계와 관련되어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資治痛鑑』에서는 바로 위의 백제침입 기사가 서로 일치하는데 서술의 기년, 내용, 문장구성이 동일하여다. 결국 삼국사기의 찬자는 『資治痛鑑』에서 영명 6년 위병의 침략 기사를 채록한 것이다.
물론 『南齊書』의 내용이 『資治痛鑑』은 편년체 사서였다. 그런데 『南齊書』「百濟傳」의 내용은 기년의 기록이 없는 상태의 내용이었다. 이러한 기년이 없는 내용들 가운데서 『資治痛鑑』의 찬자는 시세로 시작되는 기년이 없는 위로침입 기사를 영명 6년기에 편제한 것이다. 이곳의 『資治痛鑑』 내용을 삼국사기 찬자는 동성왕 10년에 채록함으로서 『南齊書』「百濟傳」 기년인 490년과는 다른 488년 기년에 기록된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