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은 국왕과 관료들이 거주하면서 그 위엄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축조한 왕성을 중심으로 조영된 도시이다. 도성제의 확립과정은 국가 권력의 발전과 긴밀한 관계에 있거니와 그 지표가 되기도 한다. 하남위례성의 위례성은 한성의 동성이칭에 불과한 것으로서 대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백제 왕성은 전 기간에 걸쳐 대성의 뜻으로 불리어졌다. 근초고왕대의 한산천도는 한강 이남지역이 아닌 북한산성으로의 그것이 되는데 대고구려전의 연승에 힘입은 북진책에 그 동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백제는 이후 대고구려전에서의 수세로 다시금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였다. 하남위례성으로 비정되는 몽촌토성은 구릉지 목책에서 출발하여 4세기 중엽경 토축성으로 개로왕대에 증토축성법에 의해 다시금 개축되었다. 몽촌토성 내에는 누각과 더불어 연못도 존재했으며 도로설계에 의해 조직적인 배열을 가지고 축조되었다. 몽촌토성의 성문 밖에는 집회소 내지 의식장으로서의 광장이 존재했으며 그 근거리에는 종묘와 사직도 설치되었을 수 있다. 왕성은 북성과 남성으로 전자는 이궁성, 후자는 국왕이 상주하는 궁성이었다. 북성은 풍납동토성으로 남성은 몽촌토성으로 비정된다.
백제 도성의 방비와 관련된 사성은 삼성동토성으로 밝혀졌다. 그것은 삼성동토성의 입지적 조건, 성의 형상에서 뿐 아니라 풍납동토성과의 구간에 개로왕대의 축조로 짐작되는 제방 유구가 확인되어 명확해졌다. 백제 도성 방비체계는 아차산성 남북을 잇는 장성의 축조로서 이단으로 완성하였다. 이 장성은 서쪽의 뚝섬평야로부터 침입하는 저을 막는, 왕성의 운명을 좌우하는 아차산성 일원의 방위에 목적이 있었다.
백제의 부여적 전통의 표상으로서 신성처인 동명묘는 문자 그대로 숭배하는 산인 숭산으로 지목되는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검단산에 소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검단산은 백제의 왕성인 몽촌토성과 정동쪽으로 서로 연결되는 위치에 소재한 바 왕도의 일월에 대한 숭배의식과 관련 지을 수 있다. 고구려와 동계인 백제 또한 마찬가지로 음혈신앙이 있었다고 상정할 때 고 소재지는 고구려의 그것과 입지적 조건이 동일한 지금의 서울시 양천구 강변동굴인 공암으로 추정된다. 도성의 외곽에는 왕실 직영 전렵지로 한산 일원이 주목된다. 일종의 영지인 한산 전렵지에는 불교수용과 더불어 불사가 창건되기도 하였다. 백제의 도성제는 근초고왕대, 개로왕대에 각각 확립되었다. 전자는 집권국가 확립기고 후자는 전제적 왕권을 구축기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