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삼국초기 영산강유역 농경의 특징
III. 5~6세기 농업생산의 증대와 영산강유역의 사회변동
IV. 맺음말
요약
삼국초기에 읍락의 거수층은 공동체적인 유대관계에 기반하여 읍락민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읍락사회에서 계층분화가 심화되면서 그들의 통치력은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여기다가 농업생산을 통하여 경제적인 부를 축적한 부호계층 가운데 일부는 거수층에게 도전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이렇게 읍락사회 지배층들이 지배기반에 크게 위협을 받은 시기인 5세기 후반에 백제국가는 영산강유역에 수리관개시설을 축조하거나 정비하여 농업생산의 증대를 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영산강유역을 영역으로 편제하여 수취기반의 확대를 모색하였다. 당시에 수리관개시설의 축조와 정비에 필요한 역부의 동원은 재지세력의 지배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백제의 직접적인 영역으로 편제되지 않았던 영산강유역에 수리관개시설을 축조하고 정비하기 위해서는 토착지배층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영산강유역 토착지배층은 읍락사회의 변동으로 지배기반이 크게 위협받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제 중앙권력과의 연결이 절실한 실정이었다. 양자의 이해관계는 백제가 영산강유역에 수리관개시설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조정되었는데, 백제국가는 영산강유역 토착지배층의 지위를 그대로 보장해주는 대신에 수리관개시설의 축조와 정비에 필요한 役夫를 동원할 때에 그들에게 협조를 요청하였으며, 반면에 영산강유역의 지배층들은 역부의 동원에 적극 협조해주는 대신에 백제국가에 그들의 지위를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백제는 지방마다 차별을 두어 단계적으로 토착지배층을 백제의 관리로 편입하는 작업을 추진하는 한편, 그 지역을 방, 군, 성으로 재편하는 수순을 밟았다. 이 작업은 6세기 중반 5방제의 정비로 마무리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