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백제의 도량형 통일
Ⅲ. 한성도읍기의 도량형
Ⅳ. 웅진도읍기 및 사비도읍 중반기까지의 도량형
Ⅴ. 도량형의 확대 변화
Ⅵ. 도량형제의 운용
Ⅶ. 맺음말
요약
초기백제는 3세기 말경까지 중국 군현의 영향으로 23㎝의 자를 사용하였지만 도량형의 통일은 아직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고이왕대에 부체제가 형성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백제에서의 도량형의 통일은 중앙집권체제를 성립시킨 근초고왕대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기준 척은 369년에 만들어진 七支刀의 길이가 75㎝라는 사실과 백제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東晋尺이 25㎝라는 사실에서 미루어 25㎝로 볼 수 있다. 이 자를 석촌동적석총의 측정치나 풍납토성 경당유적의 44호 건물지의 측정치에 적용하면 잘 맞는다. 이 25㎝의 기준 척은 웅진도읍기 및 사비도읍기 중반기까지 사용되었다. 이는 무령왕릉과 송산리 고분군의 현실의 길이의 측정치가 25㎝의 자로 재면 일정하게 맞는다는 것과 567년에 왕실에서 제작한 것이 분명한 昌王銘舍利龕과 百濟金銅大香爐 및 부여지역에서 발굴된 도로 유적이 25㎝의 척도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에서 확인되는 바이다. 그런데 7세기 전반으로 編年되는 부여 쌍북리 유적에서 29㎝의 실물자가 출토되었다. 29㎝의 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威得王代로 추정된다. 이 자는 종래의 25㎝ 자보다 16%나 길어진 것이다. 한편 한성 및 웅진ㆍ사비도읍기 중반기까지의 1斗의 용량은 청주나 공주 지역에서 출토된 量器에서 미루어 보면 대략 2400~2600㎖였다. 그러나 부여 쌍북리에서 29㎝자와 함께 출토된 1斗의 量器의 용량은 6400~6500㎖이어서 종래보다 거의 2배반 가까이 늘어난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관산성 패전 이후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이 이루어지고 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도량형이 영향을 미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관성 있는 도량형의 운영은 거래 질서의 유지와 공정한 조세 수취를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때문에 국가는 경제 질서 유지에 기본이 되는 稱量의 기준을 설정하고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처벌을 하였다. 도량형은 정치세력의 변화나 왕권의 강약에 따라 변화를 겪었다. 그렇지만 위덕왕대에 와서 한 자의 길이와 두의 용량이 대폭 늘어난 것은 귀족세력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었지만 역으로 민의 부담을 가중시켜 결과적으로 국가 재정을 어려움에 빠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