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년 무렵에 작성된 나주 복암리 목간은 영산강 유역의 지방사회 주민을 개별인신적으로 직접 지배하던 백제 국가의 통치 방식을 보여준다. 복암리 목간군은 다양한 형식을 띠고 있으며 내용도 다채롭다.
목간 2와 5는 모두 戶口에 관한 사항을 기록했는데, 전자가 어떤 호구의 현황과 변동을 조사한 것이라면, 후자는 요役을 차출하여 사역시킨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목간 2에서는 이밖에도 “正丁” 이라는 연령등급을 새로 판독하고, 婦人이 中口에 속하는 여성 2명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7세기 초 영산강 유역의 백제 지방사회에서 戶가 어떻게 구성되었고, 친족관계는 어떠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접근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목간 5를 통해서는 농업 경영의 여러 측면도 살필 수 있었다. 밭에서 재배된 陸稻는 논에서 재배된 水稻의 수확량을 상회하기도 했다. 분화된 벼의 품종 가운데 다수확의 육도도 있었다고 짐작된다. 지방 촌락민의 요역 노동을 이용하여 경작된 토지는 公有地로서, 그 수확물은 豆肹舍가 城의 재정을 운영하는 경비로 사용된 듯하다. 목간 3은 發羅郡주변에 있던 지역에서 여러 명의 匠人들을 통원한 내역과 그 使役의 組織을 기록했다.
어느 정도 판독이 가능한 나주 복암리 출토 목간들은 전반적으로 百濟의 지방관부가 작성하여 受發한 公文書와 帳簿類라고 파악된다. 그리고 이 글에서 분석한 목간을 통해서 백제 국가가 주민들을 個別人身 단위로 연령등급에 따라 장악했으며, 그 노동력을 수취하여 지방통치의 기반으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