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소전문헌 및 연구사
이 노래의 사적 배경
1) 백제의 침략 및 피침 개관
2) 신앙적 배경
4. 「시경」과의 비교
5. 맺음말
요약
무등산가, 방등산가, 정읍가, 지리산가, 산유화가 등과 함께 선운산가는 고려사를 위시하여 증보문헌비고,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에 아주 간략히 그 노래의 모티브만 기록되어 있을 뿐, 많은 학자들도 그 기록을 그대로 옮겨 놓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형편이다. 자료의 빈곤으로 정읍가를 제외한 여타 노래들은 연구대상에서 도외시 된 것이 사실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록을 바탕으로 백제의 침공회수는 심라 44회, 고구려 12회, 기타 낙랑 3회, 말갈 2회, 탐라 1회 등이었다. 피침회수는 말갈 20회, 고구려 18회, 신라 11회, 기타 낙랑 2회 위 1회 등이다. 통계상 공략이 많으나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신라의 위기의식에 따른 지모와 단결의 도전을 끊임없이 받으며 중국 남조, 왜와 교통하는 원교근공의 술책으로 활로를 찾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세련된 중국문화를 일찍 받아들이고 왜국에 전파하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싸움과 성, 책의 중수 등으로 15세 이상 남자들이 정역에 나가 시달려야 했던 것을 배경으로 이 노래가 생겨나 다양한 민요의 하나로 널리 불리워졌다.
선운산에 올라가 ‘望而哥之’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종교적 배경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영운산은 일명 선운산, 도솔산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에서 불교와 습합된 원시고유신앙 또는 도교 영향 하 이루어진 도술적 기원의 노래이다.
중국 최고의 고전이자 민간문학의 대표적 존재인 시경과 비교하여 실전 가요인 선운산가의 성격을 유추하였다. 시경이 백제에서 널리 읽혔다는 기록이 있지만 주로 지배층에 한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지배층에도 침투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선운산가는 백제 여인들 사이에 널리 불린 종교적 망부가로 삶의 고통스러움과 시대상황에 대한 풍자가 담긴 노래라고 봄이 옳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