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백제의 국가형성과 관련하여 그 형성과정과 건국집단의 성격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문헌자료의 검토를 통해 종래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한 불신의 입장을 극복하여 백제초기사에 대한 문헌복원의 시론을 제시하였다. 그 결과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해 사료비판을 가한 뒤에 이를 적극 수용하여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바탕으로 정치적 발전단계를 제시하고 삼국지 한전과 고고학자료로 보완할 수 있었다.
백제의 국가형성과정은 국읍-국읍연맹·병합-연맹왕국-중앙집권국가로 구분되어진다. 국읍단계는 기원 전후한 시기에 여러 갈래의 남하 유이민과 함께 백제 건국집단이 서울지역에 남하 정착하는 단계이다. 풍납동토성을 중심으로 하여 마한의 정복으로 상징되어지는 정변을 거쳐 백제 국읍을 형성하였다. 이들 백제 건국세력은 부여계로써 토광묘를 주묘제로 하는 집단이다.
국읍을 형성한 여러 국읍세력들이 남하하는 말갈세력에 대해 백제를 중심으로 연맹체를 결성하여 공동대처하는 단계로 기원 1세기초·중반에 해당한다. 문헌에는 말갈과의 전투에서 무공을 세운 유력 국읍수장층들이 백제국의 관제에 등용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기원 1세기말~2세기 중엽에는 말갈방어라는 구심려깅 상실되자 백제는 주변 국읍을 병합하는 단계이다. 문헌에는 신라로 표기된 진한계 국읍세력을 병합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백제는 어느 정도의 여역을 확보하게 되지만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기원 2~3세기대에는 안정된 영역을 바탕으로 연맹왕국이 성립되는 단계이며 주변 국읍세력의 자치권을 인정하면서 연맹을 확대해 가고 있는 단계이다. 한강유역 즙석봉토분의 매장주체부가 서울지역과는 다르게 나타나지만 백제라는 맹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대외 침략전쟁을 계속 수행해 가고 있다. 간단한 관제 분화가 이루어지고 말갈의 헌마와 같이 이전의 적대세력이 신속되는 성숙한 단계의 모습이 보여진다. 백제는 3세기 중반경 고이왕대를 거치면서 급속한 발전을 보인다. 고이왕 27·28년조의 관제 정비는 그 통치체제의 정비가 이루어졌음과 동시에 연맹체를 구성하던 주변 세력집단을 중앙관계에 적극 수용함으로써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해가는 단계이다.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한 치소의 정비 뿐만 아니라 왕족의 묘제도 토광묘의 유습은 간직한 채 외형은 고구려와 같은 기단이 이루어진 대단위의 묘역을 형성한 적석총으로 상징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