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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 명문에 대한 일고(七支刀 銘文에 대한 一考)

  • 분류 문헌 > 정치·외교
  • 권호수 제13.14집
  • 저자 김택균
  • 발행일 1998년 8월
  • 게재지 강원사학
  • 발행처 강원대학교 사학회

목차

Ⅰ. 序論
Ⅱ. 製作年代
Ⅲ. 人名批正
Ⅳ. 銘文의 성격과 『日本書紀』의 七枝刀
Ⅴ. 結論

요약

일본학계는 칠지도 명문을 『일본서기』의 백제 칠지도 헌상설에 초점을 맞추어 제작연대를 주로 동진 태화4 년인 369년으로 보았으나, 필자는 태화를 글자가 다른점, 동진과 교류시점의 차이, 간지상의 불일치 등을 들어 백제의 연호로 파악하여 일간지가 16일 丙午와 일치하는 연대를 산출하고, 백제왕세자 奇를 곤지로 보아 제작연대를 비유왕 19년 445년으로 보았다.
백제 왕세자를 곤지로 본 근거는 개로왕의 즉위를 전후한 시기의 심상치 않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본서기』가 인용하고 있는 백제기의 미심쩍은 기록들이다. 한강에 흑룡이 날자 죽었다는 비유왕의 죽음과 비유왕의 해골이 假葬되었다는 점, 개로왕때에 궁궐이 타버려 중수해야 하는 점 등은 개로왕 본기가 14년부터 시작되어 즉위초 13년간이나 공백으로 남아있는 점과 더불어 개로왕의 즉위가 정상적이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문주왕과 곤지가 개로왕의 아들로 되어있으나 『일본서기』의 기록을 쫓아 3인 모두 비유왕의 아들인 형제로 파악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서기』의 석연치 않은 곤지 망명 기록과 더불어 비유왕시 곤지가 왕세자였으며 개로왕이 정변에 의하여 즉위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미 개로왕때에 백제가 후왕제도를 갖고 있엇던 것으로 미루어 그 전왕인 비유왕때에도 후왕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칠지도는 비유왕 19년(445) 왕세자인 곤지가 왜왕 旨인 允恭에게 하사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필자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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