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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후반 백제의 북방경계(4세기 후반 百濟의 北方境界)

  • 분류 문헌 > 정치·외교
  • 권호수 제16·17집
  • 저자 이인철
  • 발행일 2002년 2월
  • 게재지 淸溪史學
  • 발행처 韓國精神文化硏究院淸溪史學會

목차

Ⅰ. 머리말
Ⅱ. 樂浪・帶方의 축출과 백제의 대응
Ⅲ. 近肖古王・近仇首王代의 北方境界
Ⅳ. 廣開土王碑에 보이는 백제의 58城
Ⅴ. 맺음말

요약

314년에 고구려가 대방군을 점령하자 백제는 한강이북의 소국들을 복속시켜 북방경계가 예성강에 이르렀다. 하지만 고구려가 예성강을 넘어 공격해올 것에 대비해 백제는 아단성과 사성을 쌓았다.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백제 58성 가운데 상당수가 314년에서 396년 사이에 축조되었다고 볼 때, 비류왕 11년(314)에서 근초고왕 즉위년(346)이전에도 예성강이남 한강이북 지역에 성이 축조되었을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또, 고구려의 남침으로 낙랑·대방 지역의 난민이 백제로 넘어오자 백제는 이들을 받아들였는데, 이들 낙랑·대방의 유민들은 근초고왕대 이후의 백제의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369년경까지 금강이남과 한강이북의 마한소국들을 정복한 백제는 예성강을 넘어 황해도 연백지역을 차지하고 수곡성(신계)까지 북진하였다. 나아가 백제는 평양성에 침입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백제의 평양성 침입은 일시적 기습작전이었고 근초고왕 및 근구수왕대의 북방경계선은 대개 예성강을 조금 넘는 선이었다. 이처럼 예성강이 양국의 경계선이었기에 장수산성이 고구려의 南平壤인가에 상관없이 고국원왕릉이 황해도 안악에 조영될 수 있었다.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백제 58성은 대부분 근초고왕대에서 진사왕대에 축성되었다. 특히 진사왕대에 많은 축성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는 58성 이외에도 수많은 보루성을 축조하여 고구려의 남친에 대비하였다. 이로 인해 고구려 광개토왕은 수군을 동원하여 강화·인천을 공격한 다음에, 백제의 전방병력에 공백이 생긴 틈을 이용하여 예성강에서 임진강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한 백제의 성들을 점령하고 이어서 연천·포천 등지를 거쳐 몽촌토성까지 침입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다. 하지만 백제군이 다시 몰려와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한 광개토왕은 임진강선 이북으로 철수했다. 이에 백제의 북방경계는 근초고왕·근구수왕 대의 예성강선이었지만 아신왕 6년(396)이후에는 임진강선으로 후퇴했다. 그 후 475년에 한성 함락 때까지 백제의 임진강 방어선은 지켜졌고, 그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한강이북의 수많은 城郭과 거기에 주둔한 百濟軍이었다.
백제는 근초고왕·근구수왕대에 마한을 정복하고 북으로 영토를 예성강유역까지 확대했다. 하지만 391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등장으로 북방 58성을 상실했다. 58성이라 하여 많은 영토를 빼앗긴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최근 이루어진 지표 및 발굴조사 결과를 통해서 볼 때 영략 6년(396)에 고구려가 빼앗은 백제의 58성은 대부분 한강이북에 있었고,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도 임진강 선이었다.
고고학의 조사성과를 반영하여, 4세기후반 백제의 북방경계를 좀더 명백히 밝힐 수 있었던 것이 이 논문의 연구성과라 할 것이다. 하지만 고고학의 조사성과는 발굴이 진행되면서 바뀔 수도 있는 만큼, 추후 변동사항이 있을 경우에 이 논문의 일부 내용에 수정이 있게 될 것이다. 특히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고 휴전선에서 예성강에 이르는 지역에 대한 지표 및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서 보다 종합적이고 높은 차원에서 이 문제를 검토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필자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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