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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신라왕의 군사훈련과 통수(百濟·新羅王의 軍事訓練과 統帥)

  • 분류 문헌 > 정치·외교
  • 권호수 제6집
  • 저자 김영하
  • 발행일 1990년 2월
  • 게재지 태동고전연구
  • 발행처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목차

Ⅰ. 緖言
Ⅱ. 百濟王의 軍事訓鍊과 統帥
Ⅲ. 新羅王의 軍事通帥
Ⅳ. 結語

요약

백제왕에 의한 전렵은 주로 춘추계 보다는 추동계에 한산, 서해대도, 웅진, 사히원 등 수도 근교 전렵지에서 5~7일간 일정으로 실시되었다. 전렵시에 백제왕은 상서동물인 록, 또는 신록을 획득함으로써 그 실시조건에서 고구려왕 전렵과 매우 유사성을 보인다. 한편 전렵과 같은 통치규범의 일환이었던 백제왕의 열병은 추동계에 한수를 비롯한 수도지역에서만 실시되었다.
이같이 백제는 건국 초기부터 전렵과 열병을 병행하였는데 이는 백제사회의 문화적 배경과 경제적 조건의 차이라는 이중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백제왕의 전렵은 백제건국의 주체세력이었던 부여-고구려계 유이민문화가 백제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동명묘 배알이 백제왕의 초월적인 권위를 확보하는 수단이었던 반면 전렵은 현실적 능력을 발휘하는 기회였다
백제왕의 열병은 마한-백제사회 선주민의 농업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백제 나름의 군사적 관행이었다. 따라서 열병은 실시조건에서 전렵과 일정한 상이성이 있으면서도 군사적 측면에서는 공통성을 담보하고 있었다. 전렵은 군사훈련은 물론 대외전쟁 기능까지 수행한 반면 열병은 독립적인 각부의 군사력에 대한 중앙집권적 통제로서의 군사통수기능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전렵과 열병은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신라왕은 고구려, 백제와 달리 열병만 실시하였다. 신라건국의 모태였던 진변한은 일찍이 농경사회로 전환하여 경제적 기반이 수렵경제에 있지 않고 왕실 문화계통도 범부여계가 아니기에 통치규범으로서 전렵이 아예 실시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신라왕의 열병은 추계에 알천, 양산을 비롯한 수도지역에서만 실시됨으로써 백제와 실시조건은 매우 비슷하였다. 신라왕은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군사력의 강화라는 상호배치되는 이중적인 정치과제의 효율적 운영에 상당한 관심을 베풀었다. 신라의 열병은 군사통수권의 확립에 실제 기능이 있었다. 열병에 이어 실시된 관사 등 국가차원의 행사에 최고통치자인 왕이 임석하는 사실만으로 군사통수권의 확립이라는 정치적 의미의 검출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파사왕대 열병이 비로소 실시된 사실은 신라의 실질적 국가형성에 짝한 지표적인 현상이며 왕위계승에서 비정상성을 노정했던 파사왕, 내물왕, 미추왕, 실성왕 등은 모두 열병을 통해 왕권을 안정시켰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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