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자료 DIGITAL ARCHIVE

검색

문헌

고구려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이 가진 의미에 대하여 –392년~394년을 중심으로-(고구려 廣開土王의 백제 征伐이 가진 의미에 대하여 –392년~394년을 중심으로-)

  • 분류 문헌 > 정치·외교
  • 권호수 제19권 2호
  • 저자 신정훈
  • 발행일 2011년 10월
  • 게재지 대한정치학회보
  • 발행처 대한정치학회

목차

1. 머리말
2. 광개토왕 즉위 무렵의 주변정세와 백제정벌
3. 393~394년 북중국·몽골 지역의 정세와 고구려·백제의 공방
4. 맺음말

요약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392년~394년에 백제와 공방을 벌였다. 이 연구는 고구려와 백제의 공방을 북중국·몽골 지역의 정세와 연관시켜 분석하였다. 이 시기에 북중국과 몽골 지역에서는 후연과 북위 등이 각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 시기인 385년에, 고구려는 요동지역을 차지하려고 후연과 전투를 하였으나 패하였다. 이 지역에는 풍부한 철이 매장되어 있었다. 철은 군사력과 경제력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고구려에게 요 동지역의 확보는 긴요한 것이었다.
385년부터 두 나라는 잠재적인 적대국으로 국경을 접하며, 394년까지 정치적·외교적 접촉을 하지 않았다. 후연은 392년 무렵부터 394년까지, 북위와 대립하며 적소집단과 서연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산동을 점령하려고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때 후연이 점령한 요동지역에는 방어병력만 주둔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광개토왕은 요동지역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이 때, 백제 지역에 대해 전격적이고도 단기간에 걸친 공격을 단행해 10개의 성을 빼앗았다. 그리고 백제의 요새인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광개토왕이 이 시기에 요동을 공략했다면, 후연은 그 군사적인 예봉을 고구려로 돌렸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고구려는 후연·백제와의 양면전쟁을 해야만 된다. 이것이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지 않은 주된 이유였다. 그러므로 광개토왕이 392년~394년에 행한 백제에 대한 공략은 후연을 의식한 것이었다. 적대국인 후연과 백제에 둘러싸여 있던 고구려는 양면에서 협공을 받은 위험이 있었다. 광개토왕은 협공을 받을 경우에 효율적으로 대처해야만 했다. 광개토왕이 392년에 대군을 동원해 백제를 공략한 것은 후연 보다 약한 군사력을 가진 백제를 더욱 약화시키려는 데 있었다. 이렇게 될때, 고구려는 협공을 받게 되는 최악의 경우에도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광개토왕이 392년~394년에 행한 백제에 대한 정책은 한반도와 북중국 지역, 몽골의 정세를 감안한 것이었다. (필자 요약)

동일한 곳에서 발행한 자료

  • 대한정치학회 에서 추가 발행한 자료가 없습니다.

'신정훈'님께서 발행한 자료

  • 문헌 > 정치·외교 백제 침류왕·진사왕대의 정국과 고구려의 동향(百濟 枕流王·辰斯王代의 정국과 高句麗의 동향)
    • 발행처백산학회 
    • 저자신정훈 
    • 발간년도 
    • 게제지백산학보 제90호 
    자료카드
  • 문헌 > 정치·외교 백제의 서상과 왕권(百濟의 瑞祥과 王權)
    • 발행처백산학회 
    • 저자신정훈 
    • 발간년도 
    • 게제지백산학보 제93호 
    자료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