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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왜사국서 탈취사건-602~3년 아막성·북한산성 전투와 관련하여-(百濟의 倭使國書 取사건-602~3년 阿莫城·北漢山城 전투와 관련하여-)

  • 분류 문헌 > 정치·외교
  • 권호수 제86호
  • 저자 서영교
  • 발행일 2013년 3월
  • 게재지 군사
  • 발행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목차

1. 머리말
2. 阿莫城․北漢山城 전투에 대한 여러 견해 검토
3. 倭의 신라출정 연기와 백제군 전멸
4. 북방초원의 정세변화와 고구려의 늑장 출정
5. 국서탈취에 대한 倭․隋의 黙過와 倭․新羅 관계 정상화
6. 맺음말

요약

601년 왜는 고구려와 백제에 신라를 협격하자고 제안하였고, 백제는 4만의 군대를 동원해 그해 8월 신라의 아막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왜와 고구려의 신라침공이 지체되고 있는 와중에 백제군 4만이 전멸했다. 왜와 고구려에 대한 백제의 원망이 없었을 수 없고, 603년과 615년 사이 백제는 왜에 사신을 보내지 않았고 607년 수나라에 고구려를 협공할 것을 제안했다. 고구려와 전쟁을 결심한 수황제는 백제의 청병을 반겼다.
608년 수황제의 국서를 가지고 서해안을 지나던 왜사신의 선박을 백제가 세워 국서를 압수했다. 602년 왜는 백제에게 신라출병 약속을 어긴 일이 있어 이를 문제 삼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국서 탈취사건은 수황제의 권위까지 손상시킨 사건이었으나 고구려 원정에 명운을 걸었던 수나라는 고구려 후방에 위치한 백제의 심사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의 입장에서 향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원조를 약속했던 백제에 국서탈취문제를 제기하여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백제와 왜 양국의 명백한 불협화음이라 보지 않을 수 없는 608년의 국서탈취사건은 신라에게는 왜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을 것이다. 610년 왜국에 대한 신라의 사신파견에는 이러한 기대가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왜도 자국을 찾아온 신라 사신을 환대했다. 국서탈취사건으로 백제와 관계악화가 가시화된 상태에서 왜는 신라와 기존의 적대적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의 조정은 신라사절을 의해 빈례의식을 했다. 의식의 책임자는 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 蘇我馬子였으며, 빈례에 관여한 인물들도 당시 권력의 최상층부에 있던 고관들이었다. 백제의 국서탈취에 대한 왜의 ‘반응’이 신라사신에 대한 왜왕권의 무게 있고 격식이 갖추어진 외교적 의례로 나타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원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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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처역사학회 
    • 저자서영교 
    • 발간년도 
    • 게제지역사학보 제21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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