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자료 DIGITAL ARCHIVE

검색

문헌

삼국시대의 문자생활과 그 성격(三國時代의 文字生活과 그 性格)

  • 분류 문헌 > 문화
  • 권호수 제21집
  • 저자 유창균
  • 발행일 1994년
  • 게재지 한국학논집
  • 발행처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목차

Ⅰ. 序
Ⅱ. 漢字收容의 時期에 대한 추정
Ⅲ. 三國의 文字生活

요약

(1)百濟의 漢字 사용은 高句麗나 新羅와 같이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百濟는 溫祚王4年(B.C15)에 樂浪과 修交했다. 이때 樂浪이 이미 漢字를 사용하고 있었다면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것이다. 己婁王49年(A.D125)에 新羅가 靺鞨의 침략을 받고 ‘移書請兵’한 일이 있는데 이것은 文字의 사용이 있었음을 뜻한다. 《日本書紀》應神15年(A.D284)에 의하면 阿直岐 王仁과 같은 大學者가 있었고, 日本에 漢字 漢文을 전수하는 일을 하고 있다. 또 近肖古王 30年(A.D375)에 博士 古興이 《書記》를 찬술한 것으로 되어있다. 百濟는 近肖古王 27年(A.D372)에 晋에 朝貢하고, 그 뒤 毗有王때는 宋에, 蓋鹵王때는 魏에, 東城王때에는 南齊에, 武寧王때에는 梁에 조공을 한다. 直接的인 교섭에 있어 초기 약 100年 가까이 晋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감안할 때 百濟의 漢字사용도 초기와 중기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의 基層音은 역시 高句麗와 같은 漢代音이었던 것을 가정 할 수 있고, 중기는 晋音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三國은 中期에 들어와 高句麗는 魏, 百濟는 晋, 新羅는 陳과 같은 차이가 있으나, 이들 상호간의 방언적 차이는 아직도 충분히 기술되어 있지 않다. 거의 비슷한 관계에 있었다고 볼 때, 三國의 漢字 사용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用字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독창성이 있었는지는 현존 자료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왕호는 대체로 三斤王때까지는 고유로 되어 있으나, 東城王때에 이르러 ‘東城, 武寧, 明, 威德’과 같이 漢語化한다. 일반의 人名에 있어서는 ‘志忠, 燕模, 燕會, 解誰’ 등과 같이 漢語化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地名에 있어서는 溫祚王때부터 ‘甁山, 禿山, 石頭, 圓山’과 같이 漢語化形이 보이는데 이것이 訓借表記에 의한 것인지 漢語化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3)百濟의 漢字音은 현존 자료로는 初期와 中期의 것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 현존하는 자료는 오히려 신라 中期의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것은 초기의 字音이 中期의 字音에 의해 교체된 것이 아닐까 한다. 百濟의 子音은 오히려 日本書記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日本의 假名字音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

동일한 곳에서 발행한 자료

  •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에서 추가 발행한 자료가 없습니다.

'유창균'님께서 발행한 자료

  • 유창균 님께서 추가 발행한 자료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