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목조건축의 양상에 관해서는 자료가 분명치 못해 명확히 밝힐 수 없으나 얼마간 유존된 유구와 유물 및 그에 관한 자료를 고찰한 결과 그나마 몇몇 사실이 밝혀졌고 고찰되어야 할 문제점들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건물 기단에 있어서는 삼국 모두 이중기단이 존재했고 그 형태는 상층기단은 지대석, 면석, 갑석이 있었고 隅柱를 세웠으나 아직 면석 중간에 끼는 撑柱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층기단은 고구려에서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백제 미륵사에서는 지대석, 면석의 구별이 없는 장대석 위에 갑석을 겸한 판석으로 된 포석이 있었고 신라 황룡사에서는 지대석, 면석, 갑석의 구별없는 장대석으로 만들어 그 상면은 敷塼 처리되었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 삼국시대 목조건축 기단 가운데 이중기단에 있어서 원래부터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의 구별이 없는 마치 석조기단의 퇴화형식같이 보이는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시대에 나타나는 석탑기단같이 상하층기단이 모두 지대석, 면석, 갑석 그리고 우주와 탱주가 구축된 것은 신라에서 복원적으로 발전시킨 형식인 것이다.
기단구축토는 고구려에서만 판축법으로 된 것이 확인되지 않고 백제와 신라에서는 사찰의 주요 건물 기단에 판축법이 채용되었다.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고구려에서도 판축법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초석은 삼국이 柱座없는 방형초석이 공통되고 백제에서는 그밖에 주좌없는 원형초석도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초석에 대해서는 좀 문제가 있다. 종래 확실한 고신라의 초석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된 것은 주좌없는 방형초석이며 방형초석 상면에 몰딩있는 원형주좌를 각출한 초석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초석이라고 보는 점이다. 이러한 원형주좌 있는 초석이 통일직후 세워진 감은사나 그 이전에 세워진 사천왕사 등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이를 두고 고신라와 통일신라로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기와에 있어서도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암막새기와는 존재하지 않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신라에서도 그러했는지 의문스럽다.
이같은 여러 문제점의 구명을 위해서는 관계 유적의 정밀한 발굴조사 등으로 밝혀질 것이리라 믿는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