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서울 근교, 즉 남쪽의 구 광주지역에서 발상하여 475년 웅진, 지금의 공주에 서울을 옮길 때까지 이 지역에서 백제왕국의 기초를 닦았다.
백제는 3세기 후엽 쓰여진 중국 정사인 삼국지의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54국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중에 伯濟國이 있었다. 이처럼 여러 부족국가가 있었고 그 중의 伯濟國이 중심이 되어 차츰 다른 부족국가를 정복하여 어느 시기에 54개의 부족국가를 다 정복하여 百濟는 통일왕국을 이룩하였다.
서울 근교의 백제 유적으로 현재의 풍납리토성은 한강안에 너무 가까이에 위치하여 있으나 토성을 축조한 당시에는 강안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풍납리토성을 중심으로 한강의 상하 연안을 따라 여러 개의 토성이 있었던 자취가 있는데 이것들은 북에서 남친하는 고구려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남한산성은 조선조에 수축한 것이지만 본래는 백제시대의 산성 위에 수축한 것이다. 그것은 산성의 입지적조건이나 구조로 보아 삼국시대 산성의 특징을 갖추기 때문이다.
풍납리토성으로부터 한강하류쪽으로 약 4km 정도 내려가면 석촌동이 있다. 1916년의 조사에 따르면 적석총 23기, 봉토분 66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뒤 대부분 파괴되었는데 1974년에 적석총 제 3호분과 제4호분의 2기가 발굴조사되었다.
석촌동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가락동에 잔존한 봉토분 2기가 발굴되었다. 그것들은 발굴자에 의해 가락동 1호분, 2호분으로 이름지어졌다. 이들은 다 평지에 있으면서 분형이 다 방대형인 것이 특징이다.
가락동 1,2호분은 묘제나 출토유물로 보아 백제전기, 즉 한성시대의 것이 틀림없다. 석촌동, 가락동 지역에 백제전기의 고분이 집중된 것은 이 지역에 백제 전기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에 가까웠던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이 3세기경까지 풍납리 토성은 마한의 백제 읍락국가의 도성이었으며 4세기경부터 백제국이 마한의 다른 읍락국가들을 정복하여 어느 정도의 통일왕국을 이룬 근초고왕대에 도성을 한산성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한산성, 즉 한성은 일단 유사시에 왕을 비롯한 장병들이 농성하는 산성이므로 평시에는 성하의 평지에 도읍을 이루었다. 상기한 석촌동 가락동 지역에 상당히 큰 고분군이 집중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도읍은 dl 지역에 가까운 곳으로 생각된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