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서 석탑 유구가 조사되지 않아 석탑 건립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전설적인 몇가지 기록을 통하여 방형이던 다각형이던 중층으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평면팔각탑의 의장은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건탑의 한 특색이 지방에 따라 각기 특색있는 양식을 보이게 되었을 때, 고구려 고토인 평안도 일대에서는 선대의 조형을 따라 평면팔각의 석탑이 많이 건조되어 지방 나름대로의 특징을 나타냈다.
백제에서는 목탑의 기단유구가 있어 평면방형의 고루형식으로 목탑의 건립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대륙에서 건탑되던 양식의 도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에는 다른 나라에서 보다 특징적인 것으로 석조탑파의 실례를 2기나 볼 수 있으니 익산의 미륵사지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오층석탑이 그러하다. 이렇듯 석탑의 발생은 우선 목탑의 비영구성과 또 塼材의 비생산적인 점을 고려하여 가장 영구적이고 가장 능률적인 건탑활동은 곧 석재를 사용하는 일로 착안한데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닌가 한다. 실제 한국은 어느 나라 보다도 양질의 화강암을 어느 곳에서던지 다량으로 채취할 수 있기 때문에 이후 다른 재료의 탑파들보다도 석조탑파가 훨씬 많이 건립되어 한국탑파의 일대주류를 이루게 되었던 것인데 이러한 시발을 곧 2기의 백제석탑에 두어야 할 것이다.
즉, 미륵사지석탑은 방형 다층루의 목탑양식을 석재로써 구현한 최초로 각부축조가 목조탑파 가구를 곧 석재로 옮기고 있음을 세부검토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석탑의 시원을 찾을 수 있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이로부터 양식과 축조상 상당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7세기초부터 중기까지 이루어진 백제석탑 양식은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지방적 특색이 나타나게 되자 백제고토인 충남과 전북 지방에서 백제석탑양식을 재현한 석탑들이 보인다.
신라에서는 황룡사 구층목탑지와 분황사석탑을 살펴보았다. 목탑건립의 전통은 통일신라까지도 이어지나 비영구적이므로 석탑에 압도당한다. 분황사석탑은 석재나 전축의 양식을 보이므로 신라 석탑은 전탑을 모방한데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받침형식 등이 전탑 양식으로부터 발생한 것은 아니고 전체에 하나의 양식발생사적인 계열로 볼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