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승려의 법의에 관계된 유적이나 유물이 전존되는 것이 없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살피기 어렵다. 그런데 백제를 통해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문헌기록을 통해 백제의 일반복식과 법의 또한 화려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사기 색복조에도 백제 남자 의복과 부인 의복에 관한 기록을 보면 고구려와 대략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의 승복을 입증할 자료는 없고 다만 백제 불상 조각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금동승상(민병도 소장)과 흥복사 십대제자입상 등을 볼 때, 백제의 승복은 위에 포를 입고 아래에 고를 착용하거나 착용하지 않았으며 가사는 단일색 또는 첩상가사를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삼국유사를 통해 왕과 왕비가 직접 사문이 되어 가사를 착용한 경우를 볼 수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법령으로 금할정도로 법의가 화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사는 경남 통도사에 전해지는데 지금 소장된 통도사의 불상가사는 황색 비단에 금점이 있는 가사로 문헌의 내용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왜에 약탈을 자주 당하여 본래의 가사 대신 중간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는 우리 고래의 복식에 당, 송 등 중국화된 복식을 복합하였고 백관의 공복이 제정되고 승과를 두어 선종과 교종마다 법계의 구분에 따른 복식의 차별이 있었다. 고려의 승복은 복삼, 상, 가사로 일습을 갖추었는데 대덕 이상만 가사를 입었다. 그러나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승려들이 법계를 따르지 않은 사실이 보이며 이에 현종 8년에는 승려의 백삼, 말두고, 능라혁, 백선난삼, 피혜, 채모, 입자, 관영 등 착용을 금하였다. 그러나 국사의 초상화 등을 보면 금령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