陵山里寺址는 도성 내에 설치된 寺刹과는 다른 성격으로 창건되었다. 陵山里寺址는 百濟의 泗沘遷都와 더불어 都市計劃에 맞추어 지어진 절이 아니고 聖王의 죽음을 기원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므로 中心伽藍과 廻廊이 오랜 시차를 두고 만들어 졌다기보다는 威德王 즉위 후 공사를 시작하여 威德王 13년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高句麗 陵寺플랜의 축소가 陵山里寺址에 적용되었던 것도 寺城의 동시 준공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창건이후 백제왕실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이 있던 시기는 益山遷都說의 주인공으로 부각되고 있는 武王 재위기간일 것이다. 무왕은 三國史記에의하면 宮闕을 重修하고 왕흥사, 궁남지를 落成하는 등 강력한 전제왕권을 실현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益山에 있는 雙陵과 彌勒寺는 모두 무왕과 관련이 있으면서 7세기 초엽에 만들어진 점이 중시된다. 즉, 무왕이 扶餘에 陵山里寺址의 陵寺 기능을 상실케 한 것이 아닌가 한다. 扶餘 陵山里寺址 조사결과 목탑지와 금당지를 포함하여 주변이 기와편을 깔아 정지한 듯 한 수평선이 확인되었는데, 陵山里寺址의 기능변화를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목탑 심초석은 목탑지의 基壇土를 조성한 후에 그것을 다시 파내고 놓았는데, 주변이 교란된 것이 토층에서 확인되었다. 파괴 교란된 시기가 660년이었다고 한다면 백제멸망 후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대의 유물이 포함될 가능성이 있으나 토층에서 백제시대 이후로 내려가는 시기의 유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을 뿐더러 7세기 전반기로 생각되는 유물도 발견되지 않은 것을 보아 멸망이전에 파괴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이 시기가 절로서의 기능이 소멸되고 단지 官工房으로서의 기능만이 남아있는 시기로 볼 수 있겠다. 官工房은 본래 창건과 동시에 일부 건물지에서 실시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후 陵寺의 기능이 소멸되므로 해서 강당지 마저 工房으로 변경되고, 金堂에 있었던 금동광배, 風磬板 등이 재가공되기 위하여 西廻廊址 北端建物址로 옮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마지막으로 官工房의 기능이 폐쇄된 것은 百濟 폐망과 때를 같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西廻廊址 北端 建物址가 파괴되고 그 위에 형성된 두께 5cm정도의 사질토층에서 발견된 약간의 통일신라시대 토기편들이 그 이후의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高麗時代를 지나 朝鮮時代에 들어와 전답으로 정리하여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