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산리사지는 능산리고분군과 부여 동라성의 사이에 해당하는 북고남저의 곡간 충적지이다. 이 유적에 대한 발굴은 백제문화권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나성 주변에서 확인된 건물지 유구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하여 1992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6차에 걸쳐 이루어져 왔다. 앞서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계단식 논의 북쪽 부분에서 중문, 목탑, 금당, 강당 등이 남북 일직선상으로 배치되고 주위는 회랑으로 구획된 절터가 발굴되었다. 또 회랑 바깥으로 동서 양대 배수로가 있었으며 이 배수로를 건너는 목교와 석교가 확인되었다. 이번 조사에서도 기대했던 연못시설 등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다양한 형태의 배수시설과 도로시설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적지 않은 墨書기록을 가진 목간자료가 출토되었다. 능산리유적의 6,7차 조사과정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목간 20여점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잔편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묵서기록 자체의 사료적 가치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전까지 신라목간에 비하여 그 수가 크게 부족하였던 백제목간의 자료량을 늘리면서 향후의 출토 전망을 밝게 해 주었다는 점 자체가 작지 않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금석문 기록에 필적할 만한 기록 자료로서의 목간에 대한 연구가능성이 열림으로서 백제사연구를 위한 기초자료의 폭이 넓어졌다는 점이 주목될 수 있다. 능산리의 목간들은 형태의 다양성이나 각서기법과 같은 서사방법상의 특징으로 목간자체의 연구 자료도 보충해 주고 있다. 출토된 사찰명 목간은 왕실의 기원사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불교사찰간의 교류관계 등을 말해주고 있으며 문헌기록을 통해서만 알려져 왔던 奈率, 對德등의 관직명이 당시 기록된 실물에 의해 확인되기도 하였다. ‘下部’라고 하는 소단위 행정구역을 소유한 地方城의 존재나 六部로 표현되는 사비시기 도성행정구역상의 새로운 문제 등도 앞으로 계속 연구되어야 할 과제를 남기고 있다. 출토유적이 불교사찰이었던 점에 비추어 본다면 불교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제의적 성격의 목간과 주술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되는 목간들의 존재도 주목된다. 또 불교 사찰로서 기능했음이 분명한 본 유적에서 행정구역과 관련된 기록이나 관직명 목간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능산리 사찰이 갖는 왕실의 기원 사찰로서의 정치적 위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