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토광묘와 회곽분을 제외하고 백제시대의 고분과 고려시대의 고분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 바와 같이 금번에 조사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여방리 기린마을의 고분군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시기의 묘제가 총 집합된 지역으로 각 시대별 묘제의 특징 뿐 아니라 묘제의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곳에서는 이들 고분들이 각 시대별 특징을 가지고 본 고분군에서 분포입지의 특별한 특징은 발견되지 않았다. 둘째, 백제시대의 고분은 수혈식, 횡구식, 횡혈식, 그리고 옹관묘 등 4유형의 묘제가 발견됨으로서 석축묘 등 상호 변화과정의 추론이 가능한데 10호분의 경우 장축방향 어설픈 연도 등의 시설은 횡혈식석실분으로 넘어가는 초현의 석축묘로 판단된다. 셋째, 백제시대의 각유형에서 대체로 유물이 발견되었지만 횡혈식석실분 가운데 할석이나 면석을 사용하고 편재된 연도의 고분은 유물이 발견되고 있으나 판석을 사용하여 축조된 중앙연도의 고분은 처녀분일지라도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시대적 특징을 반영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 축조된 판석조 횡구식석실분에서도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것과 관련성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넷째, 4기의 合口式 甕棺이 발견되고 있지만 석실분과의 隌葬的 관계에 대해서는 석실분과의 관계에서 立地, 長軸方向, 位置 등 일정한 정형성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다만 인접 석실분과는 시기차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며 석실분과 친연적 관계에 있었던 유아용의 옹관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다섯째, 백제시대의 고분의 축조시기는 고분의 양식과 출토 토기로 미루어 대체로 5세기 중엽에서 7세기까지 꾸준히 고분이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여섯째, 고려시대의 고분은 횡구식석곽분과 토광묘로 나뉘는데 횡구식석곽분은 연도부를 제외하고는 석재나 축조수법에서 백제의 말기 고분의 축소형태를 하고 있고, 특히 처녀분일지라도 1점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은 점은 서로 관련된 맥락으로 이해된다. 일곱째, 이들 고분의 피장자는 錦江流域을 기반으로하는 有力者들의 고분으로 추정되며 金製 裝身具와 佩用했던 것으로 보이는 金製 裝身具에서 피장자는 낮지 않은 신분의 소유자였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