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언
II. 자연환경과 유적의 성격
III. 고분의 분포현황과 조사유적
IV. 단계의 설정과 단계별 양상
V. 석곽묘의 전개과정과 성격
VI. 결어
요약
석곽묘와 그 축조집단은, 토기류의 조합상과 고총고분의 변천과정을 토대로 하여 다음과 같은 단계로 세분할 수 있다. 첫째는, 南原의 在地系 토기류만 출토되는 제 Ⅰ단계로서, 유적은 운봉고원에서 유일하게 조사된 杏亭里가 있다. 이 단계는 고령양식 토기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黃江流域의 토광묘나 湖南地方의 옹관묘 출토품과 유사한 기형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그것은 행정리에서 조사된 석곽묘가 高靈 池山洞의 영향을 받아 축조되었다는 종래의 견해와는 상반된 결과로써, 大加耶의 영향력이 미치기 이전부터 석곽묘를 主墓制로 채택한 세력집단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둘째는, 남원의 재지계와 고령양식 토기류가 혼재된 조합상을 보이는데 제Ⅱ단계와 제Ⅲ단계로서, 유적은 月山里가 있다. 묘제의 강한 지역성으로 볼 때, 고총고분은 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성장하였던 토착집단과 관련된 首長層의 묘제로써, 대가야의 영향이 아닌 자체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 생각된다. 셋째는, 남원의 재지계 토기가 완전히 고령양식 일색으로 교체되는 제Ⅳ단계로서 유적은 斗洛里와 乾芝里 등이 있다. 벽석의 축조방법, 측벽석 사이에 점토 바름, 바닥시설 등의 속성의 월산리 M1-A호와 동일하다. 그러나 두락리의 고총고분은 봉분의 직경이 월산리보다 대형화되고, 석곽의 규모도 월산리에 비해 축소내지 쇠퇴하지 않았다. 이런 특징적인 요소는 고총고분의 묘제적인 속성이 동일한 것은, 동일집단에 의해 고총고분이 축조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全北의 南江 水系地域에서 조사된 석곽묘는 4세기 중엽 전후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月山里 단계까지는 독자적인 발전과정을 보였다. 그리고 고총고분의 입지가 월산리에서 두락리로 옮겨진 5세기 중엽경에도 묘제의 지역성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토기류의 組合相은 재지계 토기가 고령양식 일색으로 대체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령이외의 다른지역과 달리 고총고분의 봉분이나 석곽의 규모가 축소되지 않고 더욱 대형화되어 갔는데, 아마도 이것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이 종래의 독자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남원의 동부지역에 석곽묘를 축조했던 토착세력은 신라양식 토기가 등장하는 6세기 중엽까지 百濟에 복속되지 않고 자체적인 발전을 지속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