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토라?고분은 그 구조나 내용을 보면 전형적인 백제후기 묘제인 ?능산리벽화고분?과 완전히 같다고 할 수 있다. 석실은 횡구식이며 사신도와 일월상, 성좌의 그림은 매우 찬란하다. 시신을 목관에 안치했기 때문에 백제왕가의 최고양식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키토라?고분의 피장자는 ?일본서기?계 황족이나 천황이 아니라 그들은 백제왕 선광 또는 그 자제인 창성일지 모른다. 적어도 그는 백제왕(대왕)에 종속된 왕족(후왕)의 한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한 왕가의 전통은 그가 속해있는 왕계의 묘제를 고집하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키토라?의 성숙도는 정교한 성좌그림이라는 점으로부터 학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서기 7세기 후반에 축조되었다는 고분으로부터 그러한 훌륭한 그림이 나오고, 게다가 그 그림을 백제인(또는 백제계도래인)이 그렸다면 오늘날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들의 백제에 대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그 진실로부터 벗어나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서에는 백제는 거대한 해양국가였다고 전하고 있지 않는가. 백제는 서기 5세기 초 대륙의 요서·진평에 진출했다고 ?송서?와 ?양서? 등 남조 사서에는 기록하고 있고, 그들은 그후 계속세력을 확장하고 일시적으로는 중국의 남부(광서지역)을 거쳐 ?흑치국?까지 도착했다고 한다.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것은 백제가 고도의 천문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지왜인전?에 의하면 ?흑치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뱃길로 1년이라는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이렇게 먼 뱃길을 장시간 항해하기 위해서는 유일한 가이드는 ?별자리?이다. 성좌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없다면 단 하루의 항해도 불가능한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따라서 백제는 ?키토라?의 성좌도와 같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일상생활에도 활용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