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한강유역의 청동기시대 유적과 유물
3. 한강유역의 철기시대 유적과 유물
4. 백제의 국가 형성과 한강 주변의 정치․군사적 상황
5. 맺음말
요약
온조집단이 한강유역에 처음 등장한 정치체는 아니었다. 한강유역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그러나 백제인의 직접 조상은 신석기시대 이후에 한강유역에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한강유역의 신석기유적은 70여개소이고, 청동기시대의 지석묘는 500여기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그러나 초기철기문화를 수반하는 세형동검 후기문화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강유역은 세형동검 전기문화에서 철기문화단계로 바로 진입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같은 현상은 한강유역의 지석묘집단 가운데 상당수가 외부사회로부터 충격을 받고 타 지역으로 이동해 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서력 기원 이전으로 소급되는 철기문화유적이 많지 않은 가운데 백제를 건국한 온조집단이 강철을 제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한강유역으로 이동하여 토착사회의 도전을 쉽게 제압하고 나라를 세웠다.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건국을 BC18년으로 전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없었는데, 다행히 최근 풍납토성의 발굴로 기원 전 1세기경에 건국되었을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석촌동고분과 풍납토성의 발굴은 온조집단이 강철제화살촉․경질무문토기․타날문토기를 사용하고 토광묘를 그들의 무덤양식으로 간직한 부여계통의 유이민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 후 고구려에서 적석총의 매장문화를 가진 집단이 남하해 한강유역에 거주하게 되자, 백제지배층은 이들을 포용하기 위하여 온조가 고구려계통이라고 하는 내용의 건국설화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계단식 적석총을 왕의 묘제로 채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개로왕의 국서에서 자신들이 부여에서 나왔음을 밝힌 사실이나 성왕이 남부여를 자칭한 사실을 보면 백제 왕실은 여전히 자신들을 부여계통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 전 2세기 초에 위만조선이 망하고 그 유민이 대거 진한 지역으로 이동하자, 한강유역의 주민들도 경상도 혹은 충청․전라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따라 기원 전 1세기경에 한강유역의 인구가 급감하였다. 인구가 급감한 한강유역에 우수한 강철제 무기와 기마전투 능력을 보유한 온조집단이 등장하여 BC 18년경에 ‘백제’라는 국가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온조왕 27년(AD8)에 백제는 목지국을 정복하고 마한 맹주국이 되었다. 하지만 연맹소국에 대한 백제의 지배가 중앙집권적인 직접 지배가 아니라 공납의례를 받는 정도의 연맹체적 지배였기 때문에 마한 소국들이 언제나 백제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잠재적인 요인을 잉태하고 있었다. 『삼국지』위서 한전에 마한 54국이 기록된 상황은 바로 위의 마한연맹체 분열정책이 성공을 거둔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