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3~4세기 韓半島와 日本列島의 文物交流
Ⅲ. 5세기 韓半島와 日本列島의 文物交流
Ⅳ. 6세기 韓半島와 日本列島의 文物交流
Ⅴ. 文物交流를 통해 본 古代 韓半島와
日本列島의 相互作用
Ⅵ. 맺음말
요약
古金海灣에 입지한 김해지역의 구야국 시기 對倭교섭의 상대는 일본열도 측 대외창구의 역할을 담당해 왔던 구주세력 이었으나, 금관가야 시기에는 畿內勢力으로 교체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동리세력이 쇠퇴하고 대성동세력이 대두되었다. 그 후 대화북부와 하내세력이 흥기하게 된다. 새롭게 대두하는 대성동세력과 대화북부, 기내세력이 공유한 금관가야제 통형동기가 착장된 鐵鉾와 판갑, 왜제의 파형동기가 부착된 盾, 벽옥제석촉을 담은 靫는 금관가야와 畿內중앙정권 내부의 권력교체에 한반도와 일본열도간의 교섭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상징하는 문물로 파악된다.
5세기 후반 대가야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 시기 왜의 유력수장묘에 대가야형의 위세품이 출현하는 것에서 새롭게 대두한 대가야 세력과 결합한 각지의 유력수장의 존재가 상정된다. 한편 대가야의 최고수장묘인 지산동 44호분 출토의 奄美大島산 야광패제용기는 대가야와 일본열도간 교류의 밀접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6세기초를 전후하여 일본열도에 도입된 문물의 舶載地가 백제로 전환되고 왜계문물 역시 낙동강유역에서 영산강유역에 집중하게 된다. 이러한 대왜교역과 교섭의 쇠퇴는 대가야의 쇠퇴와 멸망에 대한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熊本縣江田船山古墳의 백제계 문물과 무녕왕릉의 棺材인 일본열도산 金松은, 백제가 가야지역과 왜와의 전통적이고 일상적 교역관계를 넘어 대일본열도 교역과 교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을 상징한다. 이 시기 백제로부터의 諸博士와 문물은 종래의 철과 같은 필수 물자, 생산 공인과 더불어 고등종교인 불교와 같이 당시 왜가 열망하던 국가체제 정비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백제와 왜의 본격적인 교섭은 繼體朝 출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즉 계체 세력은 백제를 교섭 창구로 함으로서 선진문물을 도입하고 하내세력과 차별화를 시도하여 기내에서 우위를 확보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이 시기를 전후하여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전라남북도에서 출현하는 전방후원분의 피장자는 토착세력에 대한 통치, 견제와 對大加耶 공략을 위해 백제왕권에 의해 각지에 파견된 왜계집단으로 판단된다. 백제는 최대의 토착세력의 거점인 나주 반남지역은 재지수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그 주변을 전방후원분 피장자인 왜계 세력을 배치함으로써 반남세력에 대한 견제와 각 지역의 통치를 수행하는 양면적인 정책을 취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전략적인 요충은 백제 중앙이 직접 관리하여 왜인과 토착세력 양측을 제어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한성함락 이후 일시적으로 통치기구가 와해된 상태에서 남방의 통치와 대가야 공략에 필요한 군사력을 왜로부터 제공받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국가정비에 필요했던 제문물을 왜에 전수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