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제사유적은 제사주체에 따라 국가가 제사 주체가 되고 제사목적이 국가적인 목적성을 띤 유적과 지역세력 혹은 재지민에 의해 거행된 유적으로 크게 구분된다. 국가적 제사가 행해진 풍납동토성유적에서는 수혈로 된 제사혈에 12마리 분량의 말 하악골을 비롯한 유체가 넓게 퍼져있고 장식성 강한 토기와 다량의 유리구슬이 출토되었다. 송산리 방단형제단 유적은 이곳에 묻힌 선왕들에 대한 제단의 성격이 강하며 그 형태가 고구려 성곽 내 설치된 제단과 유사하다. 정지산 유적은 무령왕비 시신을 대묘에 안장하기 앞서 일정기간 보관한 장소로 상장의례에 따라 이곳에서 일정한 제사가 행하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공산성유적과 추정왕궁지유적은 그 성격이 확실치 않으나 고려시대 궁궐내의 제사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재지적성격을 띠는 궁남지유적 신라 수로제사유적과 성격이 유사한듯하며 논치리유적은 고성 동외동유적 등 수혈식 제사유구와 관련있고 죽막동유적은 일본의 오끼노시마유적 등 해신제사유적과 양상이 유사하다. 죽막동유적은 5~6C 백제뿐 아니라 가야, 왜까지도 이용한 국제적 제장이었다. 제사목적은 각각 수전, 수리시설, 물의 안정적 확보, 풍어, 사행 및 교역에 따른 항해의 안전, 풍작, 주민의 안녕 등에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제사대상으로는 풍납동토성유적, 논치리유적은 지신, 송산리 방단형제사유적, 정지산유적 조상신, 궁남지유적 수신, 죽막동유적 해신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제사방식은 토기를 기본제기로 하는 영천제사가 대부분이며 일상용기를 제기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경우에 따라 국가적 제사에는 마연토기, 회색토기 같은 전문제기를 사용하였다. 특히 양쪽에 전이 달린 토기는 중국 고대에 제기로 사용된 이배의 전통을 본받은 것으로 짐작되며 백제지역에서 출토 예가 거의 없기에 추정왕궁지에서 8점이나 출토된 것은 주목된다.
죽막동유적 출토 토제마는 5C~6C 것으로 보는데 마구 표현이 있으나 원삼국시대의 세전리유적 4~5C대 부원동유적 출토 토제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전 청양출토 토제마의 제작시기도 죽막동유적 출토토제마보다 앞설 가능성이 있다. 논치리유적에서 곡식 담은 용기를 주먹돌 크기의 강돌이나 할석을 던져 파쇄하거나 댓돌에 부딪쳐 깨었는데 제사가 끝난 후 파기하는 행위가 광범위하게 행해졌다.(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