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유역권의 3∼5世紀墓制는 크게 周溝墓系統, 土壙墓, 石槨墓, 石室墳으로 대별될
수 있으며, 이 지역 묘제의 변천은 通時的으로 볼 때 Ⅰ期(2세기∼3세기 중후엽, 주구토광묘단계), Ⅱ期(3세기 후엽∼4세기 전엽, 토광묘이행기), Ⅲ期(4세기 중엽∼5세기 중엽, 토광묘·석곽묘·석실분 혼용기), Ⅳ期(5世紀後葉∼6世紀前葉, 횡혈식석실분 정착기), Ⅴ期(6세기 중엽∼7세기 중후엽, 횡혈식석실분 확산기)로 나눌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중 Ⅲ기 무렵까지가 본고의 주요 검토 대상이었는데, 이 중 周溝土壙墓는 마한 고유의 묘제로서 마한 묘제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시기는 Ⅰ期무렵이라고 보았다. Ⅱ기 무렵부터는 주구토광묘가 점차 축소되는 대신 토광묘가 증가하며, 黑灰色軟質製作技術類型의 채용과 基部燕尾形Ⅱ類鐵矛의 사용은 3세기 중하반 무렵 국가적 성장을 이룩한 漢江流域百濟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것이며, 이러한 영향을 미치게된 歷史的繼起는 3세기 중엽 무렵 對帶方郡공격을 기점으로 중부 지역 집단들의 樂浪과의 변화된 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도 圓底短頸壺와 硬質無文樣深鉢形土器의 부장 전통이 계속되고 以前보다 규모가 커진 土壙墓의 축조도 보이고 있어, 비록 對外交涉權을 통한 政治的獨自性은 상실하였지만 지역 집단들의 內的인 繼起的變化와 成長도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Ⅲ期무렵에는 土器와 馬具·兵器등 각종 문물에서 백제의 영향이 절대화되고 있어 錦江流域圈이 백제의 직접적인 영역하에 편제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中部內陸·美湖川流域과 錦江下流域간에 약간의 時差를 두고 전개되며 輸入磁器등의 最上位威身財의 집중도로 볼 때 전자 지역에 그 영향력의 密度가 훨씬 높게 나타난다. 한편 5세기 무렵에는 지역별로 주로 사용된 묘제에 있어서도 中部內陸·美湖川流域에서는 土壙墓가 錦江中下流域에서는 石槨墓로 차이를 보이며, 이와 함께 지역 집단내에서 首長層의 墓制가 급격히 바뀌는 양상도 관찰된다. 이러한 墓制의 多樣性과 상위층 분묘에서 다양한 威身財가 집중되는 것은, 위에서부터의 획일적인 지배 구조의 産物만은 아니며 지역 집단들이 나름대로의 질서와 위상을 위치지우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역집단의 계층 구조와 함께 중앙과 지역간의 不平等的인 相互關係를 동시에 고려할 때 비로소 漢城期백제 사회 내부의 구조를 제대로 그려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