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白江에 대한 從來의 硏究現況
Ⅲ. 白江에 대한 位置比定에 있어서의 問題點
Ⅳ. 맺음말
요약
백강에 대해서는 660년 백제 멸망시 기사 중 백강 통과이후에 웅진강구에서 방어하는 내용이 수록된 것은 백제측 기사와 당측 기사가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우선 살펴야 하고 소정방과 김인문이 기벌포에 도착한 날짜는 660년 7월 9일이므로 7월 10일에 사비성에서 신라군과 회합하려면 기벌포에서 사비성까지 하루 일정이어야 한하는 것, 7월 9일 도착한 당수군은 조수를 타고 상류로 진입하며 임존성 공격에 실패한 소정방이 9월 4일 귀환시 의자왕 등 포로를 사비에서 배를 태워 당으로 호송하는 사실은 당수군이 사비도성 진입후 귀환을 보여주는 것이다.663년 나당군의 주류성 공격기사 중 웅진강과 백강을 별개의 강으로 인식할 경우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백촌강 전투 상황이 전개되지 않아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또 당시 당군은 웅진강만 인식하였으나 신라와 연합하면서 사비도성, 백강을 이해하게 되엇고 주류성 공격시 수로와 육로로 웅진을 출발한 나당의 수륙군이 회합장소를 백강으로 정한 것을 인지해야 한다. 남방의 제성이 함락되자 왕성을 피성에서 다시 주류성으로 옮긴 것은 백강 위치비정에 있어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또 방증자료로 무령왕 원년 백가를 백강에 던진 사실도 백강이 금강임을 뒷받침 하는 것이다. 임천 성흥산성에서 반란 일으킨 백가를 바로 옆의 금강을 두고 동진강, 안성천, 아산만으로 끌고 가 버리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다. 또 663년 백강구전보다 13년후에 벌어진 나당전쟁에서 ‘소부리주기벌포’가 기벌포의 금강하구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벌포 별칭으로 장암, 손령, 지화포, 백강이라 적혀있다.
한편 신라군이 임존성에서 끝까지 버티는 지수신군을 2주동안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설리정으로 군사를 돌이키는데 설리정은 당군이 주둔하고 신라군이 이곳에서 공적을 논하여 상을 주는 정황 상 주류성을 함락시키고 설치한 지명이 틀림없다. 따라서 주류성은 설리정의 현재지명인 서천군 관내에서 찾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