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사비도성은 1만여가의 인구가 분포하는 인구의 집중지로 도성민의 보호를 위해 나성을 비롯한 다양한 방어체계가 갖추어졌다. 도성에는 국왕이 거주하는 왕궁과 중앙 관아가 위치하며 그 중심부에는 일정 정도 정연한 가로구획이 시행되었다. 도성 내부는 5부제를 통해 귀족에 대한 편제와 통제가 이루어졌는데 도시민은 귀족과 관료는 물론 농민을 비롯한 상공인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성의 내부와 외부는 나성을 기준으로 일정한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그 내부에는 불교사원을 비롯한 기와 건물들이 즐비하여 경관상으로도 주변지역과는 확연히 구분되고, 왕실을 비롯한 국가의 주요한 의례가 베풀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사비도성은 단순한 국왕의 숙영지가 아닌 정치, 경제, 군사, 종교, 문화의 중심지인 고대도시로 파악할 수 있다.
사비시기 지방도시로서 구도 웅진성이 주목된다. 웅진성은 지방통치의 근간인 오방성 중 북방성이었고, 웅진시기의 왕궁관련 시설이나 방어시설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대통사 등의 사원과 웅진시기의 왕릉 등 종교적 성소, 5부제의 잔재 등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웅진성 내외에서 생산이나 교역과 관련된 자료가 거의 확인되지 않는 점에서 경제적 측면보다는 정치, 군사, 행정 중심지로서의 지방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웅진성 내외에서 출토된 기와나 토기 등의 고고 유물은 사비도성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양상을 보이지만, 정연한 가로구획이 없고 도시의 경계가 모호한 점 등 도시구조면에서 한계를 갖는다.
무왕의 정치적 의도에서 개발된 익산지역도 지방도시로 파악된다. 오금산성 등의 방어시설을 비롯하여 사원 등의 종교시설, 쌍릉을 비롯한 능산리형 석실,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에서 확인된 공방, 사비도성과 동일한 양상으로 전개되는 기와, 토기 등에서 미약하나마 지방도시로서의 모습이 확인된다. 현재까지 발굴된 자료상 정연한 도로구획이 없고 방어시설이 미비한 점, 유적 중심축이 일정하지 않는 점 등에서 천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사비도성을 비롯한 웅진, 익산 등 사비시기의 지방도시들은 모두 고대도시였음이 확인되며 국왕이 모두 숙영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도성에는 국왕이 상시적으로 거주하였을 것이고 웅진, 익산에도 국왕이 순행하였음이 확인된다. 이런 점에서 웅진과 익산은 도성의 전통과 연결되면서도 여전히 일정한 한계를 갖는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