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족산성의 初築時點은 성벽조사 및 성내부 퇴적조사를 통해 6세기 중후반경으로 비정되며, 그 축성 주체는 新羅이다. 이 무렵은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던 시점으로서 금산 장대리 고분군, 대전 주산리 고분군 등 신라 고분군의 등장 시점과 거의 일치되고 있다.
이 무렵 계족산성은 갑천유역의 대전분지를 경계로 서쪽의 백제와 대치하던 중요 군사 거점성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대형 저수지인 1차 저수지의 존재는 당시 성내에 많은 군사들이 주둔하였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대치 상황은 백제의 멸망과 더불어 해소되면서 아울러 계족산성의 전략적 또는 전술적 비중은 다소 감소되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7세기 중후반 경에 이르러 1차 저수지보다 규모가 축소된 2차 저수지로 개축되고 있는 상황은 이러한 산성의 역할 변화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수지가 유지되고 있는 만큼 아직 다수의 군대가 주둔하던 군사적 중요성이 높은 산성으로 볼 수 있다.
8세기 중후반 이후 계족산성의 성격은 크게 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에 이르러 저수지는 완전히 폐기되고 있는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즉, 많은 用水가 필요치 않을 정도의 소수의 병력만이 주둔하였거나 일단 유사시 入保處로서의 기능만이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 무렵 “雨述”銘이 있는 와편들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어 주목된다. “雨述”은 懷德의 百濟 古名으로서 景德王 16년(757) 경에 단행된 지방편제 일제 개편에 따라 “比豊”으로 개명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던 지명임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여기의 雨述이 계족산성이 소속된 郡名을 나타낸 것이라면 比豊으로 바뀌어져야 할 시점에 舊名이 유지되고 있어 흥미롭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금후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이처럼 군사적 기능이 감소된 계족산성은 이후 고려시대에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금번 조사된 건물지 지역을 근거로 한다면 적어도 제1, 제2 건물지가 폐기될 무렵인 12세기말·13세기초엽 경까지 산성의 유지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지점을 근거로 하는 한 그 이후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유물은 거의 없어 또 한 차례 성의 기능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