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태극전형태 금당 채용 가람의 목탑지와의 비교
III. 백제 미륵사지 목탑지와의 비교
IV. 구층목탑 조성계획의 문제
V. 맺음말
요약
일제에 의해 근대적인 의미의 연구가 시작된 황룡사 구층목탑에 대한 관심은 발굴조사가 끝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 이제는 황룡사 구층목탑에 대한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그 조성의 의미라든가, 어느 정도의 복원도 가능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황룡사에 대한 인식이 특정한 방향으로의 함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것은 유학승 자장에 의해 수당문화의 수용과정에서 황룡사 구층목탑이 조성되었다는 것과 구층목탑의 조성기술은 백제의 아비지에 의해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황룡사의 가람변천과정에 대해서는 크게 3시기, 4시기, 5시기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조영과정에 대한 시각차는 사실상 증건가람에 대한 인식의 차이, 그 중에서도 구층목탑을 조성과정의 어떤 시기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금당의 조성에서 목탑까지 연결하여 하나의 중건과정으로 이해하는 경우에는 목탑의 조성계획이 이미 중건 금당을 조성하면서부터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점이 자연스럽게 강조된다. 반면에 중건 금당의 조성계획과 구층목탑의 조성계획을 각기 달리 보는 견해는 비록 중건 금당을 조성할 단계에 목탑의 조성계획이 존재하였다 하더라도 바로 목탑을 조성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롭게 부가된 정치적 또는 종교적 이유로 인해 목탑의 조성계획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부각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목탑의 조성계획이 중건 금당의 조성시 이미 만들어졌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입론을 바탕으로 북위 영령사이래 확인할 수 있는 구층탑의 전통을 황룡사의 중건과정에서 찾아보았다. 더불어 기단부분의 토층에 대한 검토에서 미륵사 목탑지와는 일견 차별성이 있음을 확인해 보았다. 따라서 황룡사 구층목탑의 조성이 중건 금당의 조성과 그 계획자체가 별개였던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단지 신라의 건축기술력으로 금당이나 다른 중층건물을 조성하였던 것과 유사한 기단부분까지는 조성할 수 있었지만, 구층에 이르는 목탑의 건립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탑신과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 백제의 기술을 받아들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이러한 목탑 조성의 추진과정에서 자장과 아비지의 비중이 절대적이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