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묘제에서 횡혈식 석실분이 차지한 비중은 결코 적지 않다. 웅진 천도 후 묘제 전체를 통일시키고 나름의 형식변화를 거치기도 하는데, 이의 연원에 대한 문제는 다소 논란이 있다. 특히 백제사 혹은 문화의 연속선상에서 보면, 횡혈식 석실분묘제가 한강유역에 도읍하던 시기에 이미 백제사회에 유입되었음을 보여주는 가락동․방이동 석실분을 신라의 고분으로 봄으로서 혼란이 가중되었는데, 그 증거는 출토유물이었다.
백제 웅진기에는 횡혈식 석실분이 처음부터 주묘제로 활용된다. 특히 궁륭식이란 定型的인 발전된 형태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물론 이는 웅진지역 자체의 자생적 발생이나 변화 변천의 결과로 남겨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백제의 한성기 묘제가 적석총이었다는 점과 이의 존재양상, 나아가 웅진 천도의 환경을 고려하면 웅진기 백제 횡혈식 석실분의 등장은 한성지역에서 사용되던 묘제가 연속선상에서 이입된 것, 혹은 주변의 지방사회에서 사용되던 묘제가 웅진이란 도읍지역으로 역 유입된 것이 아닌가의 판단이 필요하였는데, 자료적 한계로 단지 유추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최근 조사된 횡혈식 석실분에는 웅진 천도 이전에 조성된 것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4세기 후반~5세기 중후반에 이르는 자료이고, 백제 전역에서 나타난다. 더불어 구조속성에 다양성이 있고, 葬制的으로 追加葬 혹은 묘실의 재활용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기왕에 한강유역의 가락동․방이동의 석실분을 신라고분으로 보았던 적극적 증거가 출토유물이란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유물 자체가 고분자체의 축조자를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청주의 주성리 1호 석실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주성리 1호 석실분은 백제고분에 신라유물이 매납될 수 있음과 무덤의 재활용 환경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환경은 가락동․방이동의 석실분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고, 따라서 이들 가락동․방이동의 횡혈식 석실분을 백제고분으로 보는데 출토유물이 더 이상 장애요소가 아님을 알게 한다.
최근 발견된 석실분자료 중에는 백제사회에 적어도 4세기 후반에 횡혈식 석실분이 이미 도입되었음을 보여주고, 서울의 가락동․방이동의 횡혈식 석실분도 백제고분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면서, 백제 사회의 횡혈식 석실분 전개는 도읍지에서 비롯된다는 설명도 가능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은 이미 한성에 도읍하던 시기에 유입되어 한동안 사용되면서 자체적 발전과정을 거친 것으로 볼 수 있겠고, 그것이 웅진도읍 시기에는 주묘제의 위치를 차지하는데, 여기에서 발견되는 定型的 형상인 궁륭식으로의 정착은 이미 한강유역에서 이루어졌고, 그것이 웅진으로 이입되었다는 결론도 가능하다. (필자 결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