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한강유역 횡혈식 석실분 성격 규명에 대한 연구의 문제점
III. 여주지역 석실분의 성격 규명에 대한 연구사적 배경
IV. 여주 하거리지역 석실분의 성격 : 구조적 특징과 출토 유물의 검토
V. 요약 및 결론
요약
여주의 경우 백제, 고구려, 그리고 신라의 정치적인 예속을 차례로 받아 온 지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삼국시대의 분묘가 이 지역의 정치적인 변화와 관련 지워서 설명되는 경향이 많이 있다. 葬制는 ‘보수적이어서 쉽게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을 하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묘제를 해석할 때 정치적인 변화의 현상과 결부시켜서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을 볼 때 이를 논리적인 모순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체적인 예로 여주지역이 애당초 지리적으로 서울에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한성시대 백제 문화권의 영향 하에 있었던바 비록 고구려의 정치적인 예속을 일정기간 받았다고 하더라도 짧은 시간 안에 여주의 백제적 분묘 문화가 금방 고구려의 분묘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여주지역은 6세기 중엽부터 신라영역이니까 여주지역의 석실분은 신라의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보수성이 강한 장제’의 고고학적 전제조건에 위배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설득력이 없어진다. 여주지역에서 백제초기의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을 염두에 두고 한국 고고학계는 차제에 신라가 마지막으로 이 지역으로 진출하여 이 여주지역을 그들의 영토로 편입하여 정치적으로 장악한 이후 분묘 문화가 어떻게 변화해 갔는가를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또 여주 하거리는 여주의 중심지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심하게 받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주는 서서히 정치적인 면에서 그리고 문화적인 면에서 신라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여주 하거리의 분묘 문화는 기존의 전통적인 분묘 문화, 아마도 백제문화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해 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므로 하거리의 석실분을 통일신라 혹은 통일직전의 신라묘제로 일괄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고 경우에 따라서 초기 백제의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즉, 여주지역 최초에 축조되었던 석실분들의 편년과 성격 등등이 개별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 요약 및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