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풍납토성의 현상
II. 풍납토성 조사 현황 및 의의
III. 풍납토성의 성격 및 연대
요약
지금까지의 풍납동 내부 주거지 발굴과 성벽 발굴조사로부터 그 동안 막연히 백제 초기의 토성으로 알려져 왔던 풍납토성의 실체가 어느 정도 규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풍납토성 내부에서 발견된 초기백제시대의 집자리와 출토유물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이미 풍납동에 상당한 규모의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집자리들의 평면형태와 규모로 볼 때, 여지껏 확인된 한강유역의 어떤 집자리들보다 발달된 형태와 큰 규모여서 거주민들이 상당히 높은 계급이었을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중요성을 띤 풍납토성의 성격을 단정 지을 만한 중요한 자료가 최근 추가로 발견되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한편 풍납토성 자체에 대해서는 그 평면형태가 장타원형이면서 평지에 구축된 토성이라는 점과 성벽의 축조기법 상 중심토루를 중심으로 안팎에서 비스듬하게 판축토루를 덧붙여 나가는 방법 등은 신석기시대 이래 전국시대 등에서 발달한 중국의 도성 축조기법에 비견할 만하다. 오히려 현재까지 확인된 규모에 있어서는 중국의 도성들보다 훨씬 더 큰 토성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성의 내벽과 외벽의 상부에 석렬을 쌓아 토루를 보강한 방법 등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는 예이고, 성벽 내부에 식물유기체를 섞어 쌓는 방법은 지금까지 확인된 예 중 가장 이른 시기로 향후 고대 토성 축조기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당시의 인구규모나 사회조직, 권력구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늦어도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미 이와 같은 거대한 규모의 토성이 축조 완료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성립과 발전 연구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연대를 실제 발굴조사 결과와 비교한다면 풍납토성 내부에는 기원전에 이미 사람들이 정착하였고, 특히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성벽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늦어도 3세기 중반 이전에 모든 성벽의 축조를 완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절대연대 자체를 바로 실제 고고학적 연대로 치환, 적용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10여 점의 시료가 보여주는 연대의 폭이 약 5세기에 걸치고 있어 문헌기록상의 한성백제의 존속 연대와도 거의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향후 발굴조사의 결과와 유물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한다면 보다 정확한 풍납토성의 성격과 연대가 규명될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