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1. 硏究範圍
2. 硏究目的과 方法
II. 硏究史的과 檢討
III. 土器로 본 古墳編年
1. 型式分類
2. 段階設定
IV. 土着勢力의 性格
1. 同伴遺物 分析
2. 土着勢力의 性格變遷
3. 百濟漢城文化의 成立과 展開過程
V. 맺음말
요약
4세기에 접어들면서 미호천유역은 백제한성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전의 原三國時代의 대표적 기종으로 알려진 圓底短頸壺는 점차 사라지게 되고, 4세기 중반경에 백제 한성시대의 주요기종인 有肩壺, 直口壺 등의 전형적인 百濟土器가 등장한다. 미호천유역에서 위와 같은 변화는 곧 토착세력의 변화와 일맥상통하며, 이 글에서는 토기 가운데 한강유역과 비교할 수 있는 기종을 대상으로 형식을 분류하고, 금공품의 부장현황을 살펴 지역의 토착세력의 성격을 살펴보려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백제고분 및 토기에 대한 연구사를 검토하여 선학들이 공통적으로 백제 토기로 인식하고 있는 유견호, 광구장경호, 직구단경호 병, 파배, 난형호 등을 형식 분류하였다. 그리하여 형식의 분류를 바탕으로 미호천유역을 3단계로 구분하였고 형식의 동반관계를 통하여 有肩壺와 廣口長頸壺의 유무에 따라 3시기로 설정하였다. Ⅳ장에서는 이러한 시기 구분을 바탕으로 철기류, 금공품의 동반관계를 통하여 미호천유역의 토착세력의 성격을 파악하였다. 그 결과 미호천유역은 크게 4개의 지역집단이 형성 되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는데 그 중 Ⅰ기는 각기 세 집단이 독자적인 성격을 형성하였고, Ⅱ기는 용원리유적이 위치한 천안지역이, Ⅲ기는 신봉동, 주성리유적이 속한 청주, 청원지역이 비교적 상위 집단으로 보여 진다. 그런데 이러한 4개 지역들은 Ⅰ기에는 유견호를 통한 백제한성의 문화적 동질감은 형성하고 있지만 뚜렷한 백제화의 현상은 보이지 않는다. Ⅱ기에 접어들어 장식대도 및 수식부 이식으로 보아 지방의 수장들에 의해 백제한성의 간접지배가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Ⅲ기는 완전히 백제한성의 중앙에서의 본격적인 지배가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475년 고구려에 의해 백제한성이 멸망하고, 6세기에 접어들어 신라와 청주지역에 서원경을 설치하기 이전에 이미 미호천유역에서는 신라적 위세품이 확인되며, 진흥왕의 팽창정책으로 인하여 백제한성의 입지는 점점 약화되어졌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