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금영의 연혁
III. 금영의 구조
IV. 금영을 통해 본 웅진
V. 맺음말
요약
공주는 조선시대 충청 감영, 즉 ‘금영’이 자리했던 도시이자 백제의 왕도였던 곳이기도 하다. 금영시대의 공주 시가지의 구조나 건물의 배치관계에 대해서는 관련기록과 고지도를 통해서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 있지만 백제 웅진 왕도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따라서 금영 및 그에 딸린 건물들의 배치관계를 통해 웅진시대 왕도 웅진의 시가지 구조에 접근해 보았다.
웅진이 백제 왕도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지만 당시 왕궁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서로 주장이 맞서있다. 크게 보면 공산성 안에 있었다는 주장과 그 밖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금영의 위치 및 잦은 이동을 고려해 볼 때 공산성 밖 옛 시외버스 터미널 자리는 실제로 왕궁이 있었을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공주의 지형적 조건, 다시 말해서 시내 한가운데를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르는 제민천이 있고 이 때문에 여름철에 잦은 홍수가 발생했던 것을 고려해 볼 때 지금의 시가지와 같은 평지에 왕궁이 있었다면 홍수의 피해에서 비껴가지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에 동성왕 때 홍수가 나서 민가 200여 채가 떠내려간 사실이 소개되어 있지만 왕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그 당시 왕궁은 홍수 피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곧 왕궁이 일반 민가와 같이 평지에 있었다기 보다는 공산성처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동성왕 때에 웅진교를 가설한 것으로 나온다. 이것 역시 자세한 설명이 없어 어디에다, 왜 다리를 가설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공주의 지형상 제민천을 건너는 다리를 가설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민천에 의해 왕도가 동서로 나뉘어져 효율적인 왕도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한 동성왕이 양쪽을 연결하는 다리를 가설한 것이 웅진교가 아닌가 한다. 아울러, 이때에는 다리의 가설에 그치지 않고 하천 주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무령왕 때도 똑같이 홍수가 났다는 기록이 있지만 동성왕 때와 달리 피해 사실이 빠져있는 것은 이러한 정비 사업을 통해 어느 정도 홍수의 피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밖에 대통사와 관련된 문제, 공산성내의 여러 건물지의 배치와 관련된 문제 등등 금영과 관련된 시설물의 위치와 배치관계는 백제시대 웅진의 시가지 구조를 살펴보는 데에도 유용한 측면이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