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城都邑期에는 평기와는 가래떡형 素地에 의한 제작만이 유포되었으나, 熊津泗沘期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방법과 함께 널판형 素地(粘土板)에 의한 제작기법이 새롭게 도입되어 사용되었다. 이러한 두 가지 양식은 백제 멸망시기까지 함께 존속되었다. 수막새는 漢城都邑期부터 여러 가지 文樣이 도입되어 사용되었다. 백제 시대에는 전형적인 암막새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 암기와의 기능을 이미 알거나 필요에 의하여 始原的인 기법이 도입되어 제작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원적인 암기와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시원적인 암막새 중, 하나는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것이 있다. 그 모양은 大形壺의 구연부처럼 마치 등기와와 드림새를 따로 접합하지 않고, 나팔처럼 등기와에서 드림새를 아래쪽으로 크게 벌려, 단면상 곡선으로 형성되었다. 또 다른 시원적인 암막새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은, 軍守里寺址에서 출토된 指頭紋 암기와를 꼽을 수 있다. 이 양식은 指頭紋이 있는 선단부로 가면서 기와의 중간부분부터 점차로 두텁게 조성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원적인 암막새 양식은 암기와의 선단부를 L자처럼 베어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원적인 암막새는 개체수가 적고, 모양은 아직 정형화된 형태로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충분한 검토작업이 선행되어야하는 추세이다. 그렇지만 기와를 도입한 초창기에는 기와를 지붕의 전체를 덮지 않고 장식용이나 어떤 필요에 의하여 일부분만 올렸던 것은, 중국이나 백제건물지에서 적용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의견을 수용한다면 시원적인 암막새의 등장을 외면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백제는 웅진사비기에 들어와 한성시기부터 도입된 기와의 제작기법을 한층 발전시켰다. 특히 선진적인 백제의 기와 제작기술은 일본으로까지 전수되었던 점으로 보아 이를 반증해주는 것이다. 사비기에 들어와 제작된 백제기와 기술은 출토된 막새와 평기와, 치미, 연목와 등을 통하여 충분히 검증되었다. 이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백제 자신만의 것으로 體化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서 완성을 이루어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