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百濟의 榮山江流域 領有化
III. 영산강유역의 前方後圓形古墳의 被葬者·造墓集團
IV. 맺음말
요약
한국에 前方後圓形의 고분이 있다는 것이 지적 된지 이미 오래다. 오래전부터 전방후원분의 확실한 예로서 화제가 되었던 固城 松鶴洞 1號墳이 최근의 시굴조사를 거쳐 세 개의 圓墳이 중첩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결국 한국에 있어서 전방후원형의 고분은 현재 전라남도 특히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밖에서는 확인되고 있지 않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영산강지역에서만 집중분포하고 있는 것이 전방후원분의 커다란 특징이므로 그 의미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이미 이 지역이 6세기 초까지 백제의 領內 에 들어가지 않고 마한의 잔존세력으로서 존속하고 있었다고 지적한 바 있으며 그러한 입장에서 이 지역의 영유화에 대해서 논한 바 있다. 조묘를 추진한 것은 왜와 빈번히 왕래하고 재왜세력과도 교류하여 정치적인 관계를 가진 이 지역의 특정한 수장층이라고 생각된다. 그 경우에 왜에 고유한 분형을 선택한 것은 단순한 영향이라기보다는 대외적인 정치적 어필을 넣은 것으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백제의 영유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 것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저항한 세력이 왜의 세력과도 통하고 있는 것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 분형이었다. 즉 이 지역은 왜와의 관계도 깊고 왜와의 왕래도 빈번한, 또한 왜인의 유입도 많은 지역으로 백제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세력이 산재해 있다고 상정할 수 있고 그러한 현실․의식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수장들의 연계가 상정될 수 있다. 백제와 철저하게 적대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왜와 백제와 등거리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라고 하는 정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백제의 진출이 외견적으로 왜 의존의 방향을 선택하게 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방향이 사전 협의 같은 것을 거쳐서 연합체적으로 결정된 것일까 자연발생적으로 침투했었던 것일까는 문제로 남지만 일부는 전자, 나머지는 후자라고 하는 정도로 생각해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수장들은 당연 倭의 전방후원형의 정치적 의미는 숙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규정성과 정치성이 열도에서 떨어진 이 지역까지 미친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