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景濬이 편찬한 『산경표』의 내용을 그대로 적용하여 섬진강 유역의 공간적인 권역을 설정한 다음, 이곳을 통과하는 내륙 경로의 교통망을 복원하고, 이를 분묘유적․관방유적․통신유적에 접목시켜 각각의 분포양상과 그 특징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말무덤과 가야계 중대형 봉토분의 발전과정, 토기류의 조합상, 삼국시대 문화유적의 분포양상에 담긴 고고학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였다. 섬진강 유역에는 마한세력과 관련된 재지계 토기류만 부장되고, 봉분의 직경이 10m 내외되는 40여기의 말무덤만 조사되었다. 그 이유는,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이 호남정복을 넘어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동진과 가야세력이 백두대간을 넘어 섬진강 유역으로 나아가는 서진을 차단하여, 이곳을 완충지대로 설정함으로써 가야세력과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이 서로 연대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근초고왕이 정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백제의 중앙에서 남해안 연안항로의 최대 기항지이자 교역항인 고흥반도까지 최단거리로 연결되는 내륙 경로를 확보하여, 당시 교역체계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경제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그리하여 말무덤이 자취를 감춘 이후에는 어떤 유형의 수장층 분묘유적도 조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가야토기와 백제 토기가 혼재된 상황에서 가야후기의 토기류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백제의 정치적인 불안기를 제외하면, 백제가 줄곧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무령왕 때 가야지역으로 도망간 백제 백성의 刷還地로 비정하였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