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II. 옹관묘의 성격과 변천
1. 옹관묘의 성격
2. 옹관묘의 변천
III. 옹관묘의 장제
1. 출토인골의 검토
2. 제사용구의 검토
3. 장법의 검토
IV. 결론
요약
甕棺墓는 선사시대부터 근래까지 우리나라 전역에서 土器를 棺으로 사용하여 조영되어 오던 墓制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옹관을 特殊 製作하여 成人의 伸展葬으로 사용하였으며 고분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규모나 부장유물에 있어서 타 지역의 古家古墳에 비견된다. 영산강유역 옹관묘의 시기구분은 封墳의 種類, 옹관의 器形, 왕관의 位置 등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일정한 변화와 방향성이 있다. 그러므로 영산강유역 옹관묘의 시기를 6단계로 설정한다. Ⅰ期는 무문토기를 옹관으로 사용한 幼皃葬이다. 單葬으로 옹관이 地下에 安置되어 있으며, 봉분은 삭토되어 확인이 어렵다. 시기는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로 편년 된다. Ⅱ期는 周溝土壙墓나 土壙墓의 陪葬으로 나타나며, 옹관은 일상용기인 壺類로 代用하였으며 지하 혹은 반지하에 위치한다. 시기는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으로 편년 된다. Ⅲ期는 전용옹관의 초기로 成人의 伸展葬이 가능하고 봉분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매장형태는 合口橫置 單葬으로 옹관을 土墳에 安置하고 성토한 것으로 反地下式이다. Ⅳ期는 봉분을 만든 다음 토광을 파고 옹관을 안치하므로 옹관의 위치가 地上으로 변화되는 시기이다. Ⅴ期의 봉분은 외형상 원형, 방형, 장방형으로 윗부분이 편평한 截頭形이다. 전용옹관만 사용되며 大甕은 더욱 커지고 小甕은 상대적으로 작아져 퇴행 현상으로 보인다. Ⅵ期는 영산강유역의 전용옹관을 사용하여 조영한 옹관묘가 쇠퇴하는 시기이다. 봉분의 개념이 희박해지고 옹관의 안치 위치가 일정하지 않으며 後來하는 문화 요소인 석실분의 영향을 받아 석실과 결합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옹관묘의 變遷을 封墳의 形態, 옹관의 위치, 葬法 등에서 확인하였다. 봉분의 형태 변천은 소형의 圓形에서 異形․截頭形으로, 옹관의 위치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葬法은 하나의 封墳에 옹관 1기를 매장하는 單葬에서 家族共同墓的인 多葬으로 변하고, 그 형태는 옹관과 土墳의 共存, 옹관만 다수, 옹관의 중층 등多葬이 일반화되고 성행한다. 영산강유역 옹관묘는 옹관의 크기를 기준으로 소형은 幼․小皃葬으로 알려져 왔다. 일상용 동이를 무덤독으로 쓰게 된 것은 손쉽게 이용할 수 있고 운반에 편리하며 다루기 쉽고 저렴하다. 즉 동이의 기능과 사용의 簡便性, 容易性, 經濟性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대까지 비정상적인 주검에 대하여 유아장으로 이어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