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한성기의 도성 관련 유적들을 살펴보고, 그 가운데 특히 왕성으로 인정되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 대한 최신 발굴조사 성과를 비교함으로써 한성기 도성제도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시도하였다.
최근 발굴조사에서 폭 43m, 높이 11m 이상의 규모로 둘레 3.5km 가량을 판축 성토한 것으로 밝혀진 풍납토성은 내부에서도 대형 석조 건물지와 제사유구, 그리고 다수의 주거지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유물 가운데 수십 점의 와당과 전돌, 토제관 등은 당시 일반 민가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던 특수한 유물들로서 풍납토성의 위상이 월등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도기편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기도 하여 당시 풍납토성에서 행해졌던 활발한 대외 교류를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풍납토성은 유물 분석 결과 대체로 기원 전후 ~ 5세기대에 걸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절대연대 측정결과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성벽의 축조가 완료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기존에 일부 역사학계와 고고학계로부터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되어 온 몽촌토성은 자연 구릉을 부분적으로 판축성토하여 축조한 것으로서 시간적으로도 3세기 중후반을 상한 연대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 조사 결과에서도 오히려 군사적 성격이 강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어 풍납토성과의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이야말로 백제 한성기의 첫 왕성인 ‘하남 위례성’임에 틀림없다고 판단된다. 반면 풍납토성이 축조 이후 군사적 목적으로 3세기 중후반경 몽촌토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양 성의 관계는 한성기 멸망 당시 기록에 등장하는 북성과 남성의 관계로 대별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몽촌토성이 풍납토성에서 남쪽으로 650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이렇듯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한 백제 한성기의 왕성을 방어하기 위한 도성 방어체제로서는 비록 고고학적으로 완전히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북쪽의 한강 연안을 따라서 암사동에서 삼성동에 이르는 긴 구간에 제방적 성격의 토성을 쌓은 것으로 이해되며, 동쪽과 남쪽의 배후로는 전략적 요새로서의 이성산성과 남한산성등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왕성 주변에 석촌동․방이동․가락동 등의 왕릉급 고분을 조성함으로써 특징적인 백제 한성기의 도성 제도가 완비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