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은 백제가 중국과의 교섭을 통해 선진문물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유입된 새로운 묘제이고, 이것이 기존의 백제묘제 속에 무리없이 수용될 뿐만 아니라 전통적 묘제 자체에 큰 영향을 발휘한다면 그 의미는 비단 묘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의 전반적 현상으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묘제의 역동적 전개과정에서 웅진도읍기 고분문화는 적석총이 횡혈식 석실분으로 완전교체, 정착되어 있고, 이들이 다시 지방사회로 확산되는 시기이다. 이 과정에서 전축분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백제묘제로 이전에 존재한 바 없었고, 전혀 새로운 이질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6호 전축분이나 무령왕릉과 같은 완벽한 구조물을 창출한다. 이는 백제인의 발전된 무덤 축조기술의 덕택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전축분이 특정지역에 특정시기 즉 웅진도읍시기의 왕실에만 사용되지만 이를 계기로 백제인들은 기왕의 전통묘제의 築法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선진문물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적극성을 무령왕릉을 비롯한 백제묘제의 전개양상에서 살필 수 있게 한다.
백제의 웅진시대는 정치사적으로 보면 고구려의 남진이라는 국제적 긴박함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혼란을 겪기도 한다. 혼란은 고구려와의 군사적 대립에서 실패한 결과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되면서 정치적 안정은 물론 이후 사비시대의 도약이 가능할 정도의 국력부흥도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웅진 천도 후 초기의 혼란한 정국을 동성왕․무령왕대를 거치면서 거의 안정적 단계로 진정시킨다. 그런데 웅진천도 전야의 정황을 고려하면 새로운 도읍을 경영하기 위한 문화역량은 결코 넉넉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내외적 난관의 타개는 다각도로 시도되었을 것인데, 그러한 과정에서 국제 교류의 필요성도 절실하였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한 환경에서 동성왕 무령왕대에 대중국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고, 이를 기회로 백제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문화기반을 선진문물의 도입으로 보강하고 나름의 국력중흥의 기반을 마련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무령왕릉과 같은 전축분 즉 중국 묘제의 존재는 이러한 과정에서 유입된 것이다.
전축분이 백제사회에 수용되었다는 것은 백제인의 외래문화의 수용과 이를 소화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하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이는 선진문물에 대한 백제인의 남다른 욕구, 이를 수용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자 하는 주체적 문화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흔적으로 볼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