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 도성의 구조와 방어체제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文周王의 熊津遷都는 고구려 長壽王의 치밀한 계획하에 단행된 공격에 의하여 漢城이 유린당한 뒤에 있었던 백제의 苦肉之策이라 하겠다.
둘째, 熊津城의 축조시기는 조사된 유적 가운데 堀建式柱孔을 사용한 건물지나 半地下式建物址는 백제가 웅진으로 남천하기 이전에 이루어진 성안의 부속시설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 건물지가 광복루를 중심으로 한 테뫼식 산성 밖에 시설되어 있어 이 건물지를 포용한 웅진성이 천도 이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文周王3년 2월에 城郭의 築造및 修築에 대한 기사는 없이 宮室을 重修하였다고 하고 있으니 이는 이미 王이 居處할 궁실이 어떠한 형태든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 궁실은 성벽으로 둘려진 웅진성 내에 建立되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셋째, 熊津城의 축조기법은 外壁基底에 基石을 놓고 版築또는 흙다짐으로 구축하는 방법과 基底部를 조성한 후 外壁下端에 基石을 놓고 흙다짐 한 후 성외면을 片築式으로 수직되게 築石하는 방법으로, 이와 같은 축성법은 泗沘都城과 月坪洞山城에서도 확인된 바 있는데, 웅진성에서 그 선례가 확인된 것이라 하겠다. 그 외 石城部分도 城內의 遺構로 미루어 볼 때 백제시대의 성벽을 修·改築하여 사용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 웅진도읍기의 王宮은 웅진성 내에 위치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다섯째, 臨流閣과 관련된 연못은 池塘2일 것으로 파악되며, 임류각도 현재 靈隱寺가 위치하고 있는 자리로 추정된다.
여섯째, 公州로의 진입로를 6개 路線으로 선정한 兪元載의 견해에 대체로 공감하는 바이나, 신라에 대비하기 위하여 고심한 가장 중요한 노선은 大田에서 儒城을 거쳐 공주에 이르는 통로라 하겠다. 이 通路上에 있는 沙井城을 동성왕과 성왕대에 계속하여 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신라에 대비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하겠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