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울지역에서는 서북한지역에 기인했던 打捺文과 還元焰燒成이라는 새로운 토기생산체제가 서서히 유입되어 당시 서울 渼沙里地域에 진출해 있었던 硬質無紋土器를 변화시켜 나가는 한편 3세기 중엽경부터 중국 楊子江流域의 새로운 토기 전통이 가미되어 전형적인 백제토기로 출발하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백제토기는 고구려계 이주민들이 가지고 내려왔을 고구려토기와는 거의 무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둘째, 3세기 중엽경에 이루어진 백제의 건국과 함께 전형적인 백제토기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서북한 토광묘문화 계통의 토기 전통은 백제토기 성립의 밑바탕이 되었던데 반해 중도문화 계통의 토기 전통은 백제토기에 흡수․통합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석촌동 고분군 출토토기를 Ⅰ~Ⅶ기로, 몽촌토성 출토토기를 Ⅰ~Ⅲ기로 나누어 발전과정을 살펴보았으며 건국 직후부터 주변지역으로 확산되고 상황을 토대로 백제초기의 성장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백제토기의 남쪽 확산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淸堂洞遺蹟과 松節洞遺蹟을 들 수 있으며 두 유적 모두 3세기 후반에는 기존의 토기 전통이 무너지면서 서울지역의 토기를 수용하고 있는데 이는 미사리에서 파악해 볼 수 있는 것과 동일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그 이남지역에서는 4세기대에 전북지역의 기존의 옹관묘가 대형화 과정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점에서 4세기대의 백제의 지배권이 전북지역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넷째, 생활유적과 매장유적의 百濟土器는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石村洞古墳群과 夢村土城이 백제 한성시대 동안 공존하면서 백제 건국에 참여하였던 집단에 의해 각각 매장유적과 생활유적으로 활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同一器種의 토기가 처음 출현하는 시기는 매장유적이 생활유적보다 훨씬 늦다는 점에서 생활유적과 매장유적의 토기는 분명히 구분됨을 알 수 있었다. 같은 지역, 같은 시대, 같은 문화에 속하면서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古墳 副葬品으로는 종류가 다양한 實用土器 가운데 傳統性이 강한 제한된 특수토기만이 사용될 뿐이기 때문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