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I. 任那四縣과 己汶, 帶沙의 위치
II. 5세기 후반 大伽耶의 成長과 호남 동부지역 진출
III. 6세기 전반 호남 동부지역을 둘러싼 大伽耶와 百濟의 攻防
맺음말
요약
본 연구에서는 『일본서기』 계체기에 보이는 임나사현과 기문, 대사지역을 둘러싼 대가야와 백제의 공방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먼저 임나사현과 기문, 대사 지역의 위치와 성격에 대해 호남 동부지역에 속하는 여수, 순천, 광양, 하동, 남원지역으로 비정하고, 이러한 지역이 대가야권역임을 확인하였다.
종래 대가야의 발전은 야로분지의 철산 개발에 의한 것으로 파악되어 왔으나 본고에서는 이를 기반으로한 섬진강로와 임나사현의 확보를 통한 남해안 제해권의 장악이야말로 내륙에 위치한 대가야가 가야의 중심국으로 군림하게 된 배경으로 보았다. 즉, 이 시기 대가야는 남해안의 해상교통을 장악함으로써 가야지역의 중심국으로 지위를 확보하고, 對 일본열도 교역에서 금관가야뿐만 아니라 신라와의 경쟁에서도 우위에 선 것이다.
6세기 전엽 영산강상류역의 광주, 담양지역과 해남반도에 전방후원분이 출현한다. 이 시기 백제가 임나사현, 기문, 대사지역을 공략하는 것에서 백제의 대 대가야 전략과 관련하여 이 지역에 전방후원분이 출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호남지역의 전방후원분과 동시에 임나사현, 대소와 인접한 가야지역에서 왜계고분이 출현한다.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과 가야지역의 왜계고분은 임나사현과 기문, 대사지역을 중앙에 두고 분산 배치되어 있고 6세기 전엽에 국한된 출현시기와 각각 백제와 대가야산 위신재를 보유한 것에서, 이는 임나사현과 기문, 대사지역을 둘러싼 백제와 대가야의 공방전에 북부구주지역을 비롯한 출자가 다른 왜인이 백제와 대가야측에 각각 備兵으로 동원된 것으로 본다.
6세기 전반 백제가 임나사현과 대사진을 점령함으로써 대가야는 남해안의 제해권과 교역항을 상실한다. 이에 따라 대가야와 일본열도의 교역이 퇴조하고, 대신 백제산 문물이 본격적으로 일본열도에 이입된다. 이는 대가야의 쇠퇴와 멸망의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