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ㆍ라 회맹지로서의 “就利山”은 역사적 기록을 구체화할 수 있는 유적지로서 주목되는 곳이다. 현재 취리산의 위치비정에 대한 노력에서 유력한 후보지로 집약된 곳은, 공주 금강 북안에 위치한 취리산(치미)과 서북쪽에 위치한 연미산(취미산)이 거론되어 왔다. 이에 그동안 이루어진 취리산과 연미산에 대한 시굴조사 내용을 검토해 보았다.
就利山 濟羅會盟과 관련된 기록가운데, 『三國史記』卷6 新羅本紀 第6의 文武王 5年 8月條의 ‘埋牲幣於壇之壬地’와 『三國史記』卷7 新羅本紀 第7의 文武王 11年 7月條의 ‘又於就利山築壇’에서와 같이 구체적으로 築壇의 정황이 파악된다. 회맹의 특성상 壇을 구축하였을 경우, 주로 대상지역의 정상부나 이에 준하는 지역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추정된다. 따라서 회맹지의 위치를 추정하는데 있어서 壇의 존재가능성을 파악할 수 있는 입지의 문제도 중요한 검토대상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취리산과 연미산 모두 제ㆍ라 회맹이 있기 이전의 유적이 존재했던 지역이다. 또한 이후에 통일신라시대 토기편이 유입되어 있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상호 공통점이 간취된다. 그리고 취리산과 연미산 모두 公州에서의 접근성은 양호한 지역이다. 취리산의 경우 당시 지형은 정안천이 서편으로 흘렀기 때문에 신관동 일대와 지형상 연결되는 곳이었으며, 연미산도 곰나루와 직접적으로 마주보는 지역일 뿐만 아니라 연미산 남서쪽에 연결되어 있는 소하천을 통한 접근성이 매우 양호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입지상의 차이점은 연미산이 취리산보다 높은 지역에 해당한다는 점과, 공주시가지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취리산은 북쪽에 위치하고 연미산은 북서쪽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두 지역의 지형은 저지대의 구릉과 높은 산으로 차별화되는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會盟과 관련된 壇의 존재가능성을 추정할 경우, 지형특성상 취리산 보다는 연미산의 지형입지가 단을 조성하는데 우월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97년과 2008년에 이루어진 두 조사 모두 유적의 존재 가능성에 대하여 현황을 파악하고자 했던 시굴조사 이므로, 시굴조사 결과만으로 구체적인 유적의 성격이나 형태를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고로 판단된다. 역사기록을 구체화할 수 있는 유적의 입지에 대한 검토인 만큼, 고고학적 정황과 더불어 역사적 상황에 대한 검토도 함께 이루어져야 될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취리산회맹지의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비정된 취리산과 연미산에 대해서는 확실한 유적의 성격과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정밀 발굴조사를 통하여 관련 유구를 확인해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