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머리말
Ⅱ. 陵山里 木簡의 出土遺構와 그 평가 문제
Ⅲ. 陵山里 木簡의 作成者와 行政支配
Ⅳ. 陵山里 木簡의 特性과 宗教儀禮
요약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출토된 목간에 대해 필자는 능산리 목간이 사비도성의 나성 축조와 관련되어 작성되었다는 나성축조 목간설을 제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필자에게 이의를 제기한 논고들이 등장하였다. 본고에서는 그 중 윤선태와 이병호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필자의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목간출토유적의 성격 문제에 접근하였다.
이를 통해 종교의례 관련 목간이 행정관련 목간과 같은 시설에서 작성․사용된 것이 능산리 목간의 특성임을 보다 확고하게 정립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목간 성격을 통해 목간은 나성대문의 국가제사와만 한정하여 생각할 수 없으며, 사비도성이 충분히 기능하였을 시기 능산리 지역에서 행정기구가 별도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극히 낮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목간 출토 유적은 사비도성이 완성하기 전에 일시적으로 기능했던 행정기구였다고 생각된다.
능산리지역의 입지적 환경을 고려해보면 사비도성 조영 가운데 가장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을 동나성에 인접하였고 동성왕 이래 東原의 전통을 계승한 중요행사의 거행장소였던 동방의 땅이었다. 이 지역에 백제왕권이 사비천도에 앞선 이른 시기부터 사비도성 조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거점시설이나 제사시설을 설치하였을 것임은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도성조영의 목적으로 일찍이 설치된 이 시설을 사비도성 성립 이후에도 도성신앙의 성지로서 계승, 정비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모습들은 능산리 목간이 동나성 축조에 관련된 목간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목간 출토유적이 동나성 축조 공사와 관련이 있는 만큼 목간 작성연대도 527~538년 무렵이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단 아직 동나성 축조의 절대연대를 이야기하기 어렵고 그러한 시설은 나성 축조 후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그 작성 시기를 사비천도 계획 단계부터 능산리 사원 건립 때까지로 폭넓게 상정해 둘 필요는 있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지난 논문에서 능산리 목간은 나성축조 목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 필자를 비판했던 연구들은 필자의 의도와는 달리 축조 공사라는 지극히 좁은 범위로 이해한 것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나성축조는 사비도성 경관 속에서 나성이 이룬 역할 전체를 포함시킨다는 뜻이다. 그 가운데 축조 공사가 당연히 중심적 비중을 차지하지만 나성이 행했던 역할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