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단실묘 4벽에 사신도를 주제로 배치하는 방식이 고구려가 아닌 6세기 전반 520년대 백제 송산리6호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이 사신도 주제의 벽화묘제는 무령왕릉과 함께 당시 중국 양나라 영향을 받은 송산리6호분에서 백제인들이 개발한 결과이다. 벽돌로 축조한 벽면 위에 사신의 형상에만 회칠을 하고 벽화를 그리는 독자적 기법을 창출해낸 것이다. 한편 조성시기로 볼 때, 사신도 테마의 아이디어가 고구려 호남리사신총으로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동시기 무령왕릉의 연화문이나 인동당초문이 진파리1호, 4호분 장식에 영향을 미쳤음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신도는 중국 한대부터 유행하였고 고구려에서도 2백년 이상 고분벽화의 일부 소재로 활용되었다. 5세기 후반~6세기 전반경에 내려오는 인물풍속도나 기타 장식문양 못지않게 그 비중이 증대되며 사신도만을 주제로 삼는 벽화가 그 연장선상에 생겨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데 왜 백제 공주시대에 처음으로 전축분 회면화법의 특이한 방식으로 사신도가 고분벽화에 이용되었을까는 아직 수수께끼이다.
또한 고구려 후기 사신도 벽화는 회벽화 전통 아래 북위 이후 남북조의 묘제에 나타난 사신도 형식을 고구려화시킨 것이다. 또 근래 중국에서 발견된 수당풍의 사례들이 6세기 말~7세기 전반의 사신도 표현과 유사하여 고구려가 새롭게 형성되는 외래 형식의 수용에도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신도 벽화의 표현방식을 통해 고분 편년을 세분해 보면 6세기 전반 백제 송산리 6호분에서 고구려 6세기 중후반 호남리사신총, 진파리4호분, 1호분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진파리고분의 회면벽화에는 중국 남조 양식을 소화한 백제풍이 수용되고 석면벽화의 유행으로 전환한다. 6세기후반~7세기 초 남북조 후기와 수·당풍에 자극받으며 석면화법의 통구사시총, 통구오회분 등을 거쳐 6세기 말~7세기 전반 석면저부조화법의 강서대묘, 강서중묘 그리고 동시기 백제 석벽화인 부여 능산리벽화고분으로 귀착되었다.
이처럼 회벽화에서 석면화, 석면저부조화로 발전한 사신도 벽화기법은 각 고총별 개성을 뚜렷이 하면서 삼국시대 후기 그 조형미와 찬연한 색채 감각을 조화시킨 탁월한 회화 예술을 창출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