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막동 제사유적은 삼국시대에서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누층적으로 제사가 행해진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標識的인 제사유적으로 각 시기별 제사양상을 단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검토결과를 토대로 報告文의 고찰결과와 대비하여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한 사견을 제기하면 다음과 같다. 1. 분묘의 제사유구에서 제사유물의 출토상태는 함양 백천리 1-3호, 남원 두락리 1,3호, 합천 반계제 다A호, 고령 지산동 32-36합사유구, 본관동 34-36호 등의 예와 같이 가야지역에서는 제사용기가 토기중심이며, 제사시 이를 인위적으로 파쇄시키고 있다. 죽막동의 경우 철모 몇점을 제외한 나머지 토기와 금속기들은 모두 인위적으로 파쇄된 형태를 띠고 있다. 따라서 죽막동의 제사형태에는 대가야적 제사관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무기, 마구 등 금속기가 납입되어 있는 토기는 5개소의 옹이다. 그런데 옹3은 전체적인 기형, 색조, 구연부의 세부형태 등이 옥전 M3호묘 출토품과 잘 대비된다. 한편 옥전 M3호묘의 대옹과 죽막동의 옹3의 태토분석에 의하면 양자가 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 금속기들은 옹3의 토기와 함께 대가야지역으로부터의 이입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3. 금속유물의 전반적인 양상은 대가야와의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이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류가 제사주체로 상정한 지방토착세력 자체의 직접적인 교류에 의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러한 교류가 백제지역내에서의 단위집단간의 교류가 아니라 신라, 가야라는 「國」단위의 교류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들 유물들이 중앙지배세력으로부터의 분여와 같은 형태에 의해 제사주체로 위임받은 토착세력에 의한 것이든, 중앙지배세력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던 제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금속유물이 집중된 5세기말~6세기초의 시기에 있어서 죽막동의 제사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생각된다. 4. 제사에서 공헌된 금속유물 가운데 도, 검, 모 등 무기류의 비중이 높고, 모조품 가운데에서도 단갑, 도 등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제사의 대상 내지는 제사의 목적에 군사적 의미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사의 대상을 해양신으로 규정하고 전 기간에 걸쳐 제사의 목적을 해상활동 특히 해운에 일률적으로 조명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연구원 요약)